넌 원래 그런 애야.
사고가 나기 전에 한 달 정도, 매일 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정말로 조울증이 맞았는지 의심스럽지만, 병원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안다. 사고로 입원하게 되면서 매일 진통제와 이것저것 주사를 맞아야 했기 때문에 약을 중단했었는데, 그때의 기록을 하려고 한다.
조울증은 단순히 감정 기복과는 조금 다르다. 정식 명칭은 ‘양극성 장애’다. 조증 시기보다 울증 시기가 훨씬 자주 길게 오기 때문에 우울증과 헷갈릴 수 있다. 나도 우울증인 줄 알고 병원에 갔다가, 과거 이야기를 한참 듣던 선생님이 갑자기 정색을 하시면서 ‘조울증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결과는? 중증이었다.
그 과거 이야기란 간단히 말해서 내가 무슨 선택받은 사람이 된 줄만 알았던 경험이다. 어느 날 집에 가는 길에 뭔가를 깨닫고 머릿속이 우주만큼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펑하고 뇌에서 폭죽이 터지는듯한 기분이었다. 그 날 나는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한 기분으로 집에 갔고, 늘 걷던 길인데도 ‘이 길이 원래 이렇게 넓었나?’ 하며 낯설어서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 걸었던 기억이 있다.
난 그게 내가 뭔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서 시야가 달라진 줄만 알았다. 그래서 일기장에도 기록해 놓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상담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심각하게 들으시더니 위험할 수 있다고 하셨다.
상담을 받던 당시엔 우울증 시기라서 매일같이 죽음에 대한 생각과 무기력함 따위와 싸우고 있었는데, 기분 조절제를 처방받으니 플라세보 효과인지 하루 만에 한결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에 의존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고가 난 뒤 한동안 약을 먹지 못하자, 우울감은 훨씬 더 깊게 찾아왔다.
내 사고가 어쩌면 조울증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느낀 감정들은 모두 조울증의 산물이었을까. 그럼 나는 이제 어떤 감정을 어떻게 느끼고 살아가야 할까.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고, 움직일 수 없어 소변 줄을 꽂고 매일 누워만 있던 내 몸에 욕창까지 생기면서 우울함은 배가 되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 덕분에 그 심각한 우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는 두 번째 수술까지 끝나고 한참 재활 치료를 할 때쯤,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기 위해 하루 외박 신청을 하고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크리스마스라기엔 평범한, 그러나 행복했던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다시 병원에 가기 전에 집에서 편안하게 머리를 감겨주시던 엄마하고 이런 대화를 했다.
“엄마. 조증 증상 중에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는 것도 있대. 어쩌면 사고 난 것도 조증 때문인가 봐.”
“글쎄. 나는 네가 너무 그 ‘조울증’이라는 데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아니었어도 넌 스쿠터 탔을 걸.”
“그런가? 히히.”
“그래. 넌 어릴 때부터 그랬어. 원래 감정 기복도 심하고 그런 애야.”
이상하게도 이 말이 그렇게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머리를 말려주는 엄마를 뒤로, 드라이기 소리에 내 울음소리를 묻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이가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은 것처럼 기쁘고도 서럽게 펑펑 울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