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 작곡,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어찌어찌 병원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건 6주쯤 지났을 때부터였다. 슬슬 병문안 오는 사람도 끊겨가고, 열려있던 종아리를 다시 봉합하면서 흉측한 쇠막대기들도 사라졌다. 식물인간처럼 매일 침대에 누워 어디론가 실려 가서는 뭔가를 찍고, 뽑고, 검사하던 것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아픔의 정도는 비슷했다. 여전히 나는 고라니 같은 울부짖음을 내뿜었고 매일같이 아픈 다리를 혹사당했다. 가만히 있을 때도 아픈데 의사 선생님은 날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다리가 굳으면 안 되니 발가락이라도 살살 꼼지락거려야 한다는 것이다. 퉁퉁 부은 발가락을 한 번 까딱거릴 때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의 몸은 전부 연결되어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발가락 까닥임 한 번에 온 다리가 저릿저릿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픔에 익숙해지는 나 자신이 뿌듯했다. 종이에 손만 베어도 호들갑을 떨던 내가, 이런 내가 이렇게나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니.
그런데 사람이란 정말 신기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적응하고 웃을 수 있으니 말이다. 우울함과 감사함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을 하던 내가 차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새로운 취미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줄곧 예술가를 꿈꿔왔다. ‘예술가’라고 하면 사람들은 “어느 분야?”라고 되물어온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항상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문제였다. (엄마의 말씀에 따르면,) 재능이 너무 많아 오히려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렸을 땐 만화가를 하고 싶었고, 학창시절엔 작곡가를 꿈꿨고, 성인이 된 후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해 학원에 다니거나 레슨을 받으면, 꼭 재능이 있다며 칭찬을 받았다. 어쩌면 고래가 춤추도록 열심히 부채를 부쳐 주신 선생님들의 노력일 수도 있겠으나, 그 부작용으로 나는 ‘뭐든 하면 잘한다’는 자만심에 빠져 피나는 노력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자만심과 우유부단함 사이에 끼어 대학도 어영부영 자퇴를 했고, 20대 중반이 넘도록 변변찮은 직업을 갖지 못했다. 그로 인한 방황이 언제나 날 갉아먹었고, 그 방황의 정점이 이 스쿠터 사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이 방황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라고 느꼈다.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느냐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리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창작’이었다.
‘동물이 사람을 사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기 창 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음악적으로 표현해 볼까?’
‘내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려면 어떤 메시지가 좋을까?’
상상력을 동원하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 하나로 예술적 영감을 기록하며, 그렇게 병실 안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렇게 19개의 아이디어 스케치와, 6개의 노래와, 2개의 시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