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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 Nov 21. 2020

[병원여정] 08. 합의하면 편지를 써 준다고요?

이게 말이야 방구야.

 상황은 이렇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많아서 잘못 스치는 거로 착각한 내가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내 뒤를 따라와서 똑같은 부위를 또 만졌고, 상황 파악을 마친 나는 그대로 그 사람을 붙잡고 지하철에서 내려 경찰에 신고했다.


 내 나이 또래의 그 남자는 뻔뻔하게도 낯짝 한 번 변하지 않고 ‘왜 그러시죠?’를 반복했다. 오히려 정말 억울하다면 되레 화를 내거나, 혹시 오해하셨다면 죄송하다고 말할 법도 한데 ‘어디 네가 해볼 테면 해 봐라.’라는 표정으로 나를 조롱하듯 쳐다봤다. 사실 전에도 성추행은 몇 번 당해봤지만 이렇게 범인을 즉시 검거해서 신고한 경우는 나도 처음이었던 터라, 심장이 마구 뛰고 손이 덜덜 떨렸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실 추행을 당한 사실보다, 내 편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힘들었다. 그 남자가 발뺌하며 도망치려고 문이 닫히는 지하철에 억지로 올라타려 할 때, 나는 “도와주세요! 성추행범이에요!”를 외치며 그 남자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겼지만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아무도 그 남자를 밀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더 이상한 사람처럼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더 수치스러웠다. 


 다행히 나와 그 남자는 각각 다른 경찰서로 가서 진술했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는 내게 여자 경찰분이 휴지를 건네며 친절히 진술을 들어주셨다. 그리고 그 순간 용기를 낸 나의 행동을 칭찬해주셨다. 그 칭찬을 듣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계속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버티던 그 남자는, 결국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고 나서야 범행을 인정했다. 나는 사건 당일을 빼고는 그 남자를 더 보지 않아도 됐다. 성추행의 피해자는 법원에 얼굴을 비치지 않아도 됐고, 그래서 나는 국선 변호사님을 통해 매주 금요일, 문자메시지로 사건의 경과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고역이었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주 금요일마다 사건 경과를 보고받는다는 것은, 매주 그 사건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입원한 동안에 그 문자를 받으면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 합의를 바란다는 내용이 계속해서 문자로 전송되었다. 그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은 합의할 시 사과 편지를 써 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입장을 전해 받고, 내가 변호사님께 물은 것은 단 하나였다. 


 “혹시 그 사람에게 정신 질환이 있나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알려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변호사님께서 내가 안쓰러웠는지 작게나마 귀띔을 해 주셨다. 그 사람 이상하긴 하다고. 


 처음 그 남자의 뻔뻔한 태도를 보고는, 절대 합의 하지 않고 법대로 해달라고 밀어붙였다. 그런데 교통사고가 나고, 천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찍힌 처방전이 보이자 차츰 내 생각에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과연 내가 이렇게 아픈 상황에도 저 멍청한 사람과의 법정 싸움을 계속하는 게 맞는가? 


 그리고 결국 합의를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사과 편지를 받았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으면 합의를 철회하고 싶은 욕구가 확 치민다. 제대로 반성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그것을 읽고, 너무 화가 나 편지를 다시 쓰라고 했다. 두 번째 편지는 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은 병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나는 정신 질환자와의 법정 싸움을 끝냈다.


(편지 내용을 촬영한 사진을 첨부하려고 했으나, 저작권 위반의 우려가 있어 지웁니다. 안타깝네요... 정말 화가 나는 편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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