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치 운동치가 도전하는 수영일기 prologue
결혼 후 신혼부터 큰 아이를 낳고 8년을 한 동네에 살았다. 처음엔 출, 퇴근하느라 잠만 자는 동네였지만 큰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아이 친구 엄마들이 하나둘 동네 친구로 자리 잡아가던 그때 갑자기 남편 회사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첫 사회생활부터 10년 넘게 직주근접 도보 20분을 넘기지 않던 남편이 차로 40분 넘는 거리를 3년 넘게 다니고 나서야 꺼낸 이야기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남편의 회사가 가깝다는 이유로 이사 온 이 동네에서 나는 아무런 인간관계도 없고 그동안 내 인생에서 아무 연고도 없었다. 그런 동네로 이사 온 지 달 만에 코로나 셧다운이 시작되었다.
이사 오기 전 불이 나게 몇 십 군데 전화를 돌리고 난 후 대기에 대기 끝에 겨우 한자리가 났다며 연락받은 작은 아이 어린이 집도, 여기저기 미리 입학 상담과 레벨테스트 예약을 해 두었던 큰아이 학원도, 심지어 학교마저 모두 문을 닫았다.
남편은 어차피 작은 회사라 직원들끼리 돌아가며 출근이며 외근이며 재택이며 하니 상관없다며, 출근을 해 주었지만 남편만 밖으로 나간다는 그것이 내게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일단 아이들 둘의 돌밥세끼는 기본이고, 초등학교 2학년이 시작되던 큰 아이의 학교 줌수업을 시간 맞춰 들여보내고, "엄마, 나 뭐 필요해, 선생님이 책상에 준비하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건을 찾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쓰윽 대령해 준다. 4살이 된 작은아이의 "엄마, 나 너무 심심해"까지의 환장 콜라보를 오롯이 혼자서 겪어야 하는 그 시간.
하루가 어떻게 끝났는지, 한 시간이 갔는지, 하루가 갔는지, 이틀이 갔는지 알 수없이 집안의 공기는 점점 더 숨 막히게 텁텁해졌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과 온전히 숨 쉬는 시간은 하루 30분 집 앞 놀이터를 나가는 것이었다.
큰 아이 학교 온라인 수업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치우고 나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는 핑계로 집 앞 놀이터에 아무도 없나 확인해 보러 다 같이 마스크를 꽁꽁 여민 채 나갔다.
그렇게 놀이터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면 아이들은 놀이터로 뛰어갔다.
아이들은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추워도 놀이터에 나오는 그 순간이 코로나 격리 생활에 작은 기쁨이 되었고, 나도 마스크 사이로 들어오는 그 바깥바람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 기간이 길어지고 길어질수록 그렇게 점점 나의 인간관계는 단절되었고, 동네 길은 익숙하지만 동네 사람은 낯설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세 번의 코로나를 겪었고, 격리하고 완치하고를 반복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우울증이 왔다. 저녁마다 맥주를 한 캔씩 까는 날이 일상이 되었고, 비가 오는 날은 창문에 물방울만 봐도 미친년처럼 눈물이 나고, 아이들이 자고 나면 베란다에 멍하니 서 있는 내 모습이 남편은 무섭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은 나에게 차라리 정신과 상담을 가보자고 이야기를 했다. "정신과 상담? 그래볼까?"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소파에 앉아 나누다가 멍하니 거실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번뜩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이사오기 전 한참 집 구경 하러 다니면서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부동산 소장님과 전에 사시던 두 분이 모두 입을 모아 자랑을 아끼지 않으시던 그 건물.
"여기 바로 거실 베란다 이 앞에 보이는 이 건물이 엄청 큰 스포츠 센터예요. 수영장 스케이트장 다 있고 애들 어려서부터 운동시키기도 너무 좋고 나라에서 하는 거라 비싸지도 않아. 애들 키우면서 살기 너무 좋지 뭐"
코로나 기간 동안 운동이라고는 아이들과 놀이터 아니면 남들 몰래 마스크를 잠시 벗을 수 있는 뒷동산을 오르기만 다닐 뿐 스포츠센터에 다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환기도 안될 것 같은 공간에 모두 같이 마스크 쓰고서 그 틈 사이로 가쁜 숨을 내뱉으며 함께 운동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번뜩 저 건물에 수영장이 있다고 했지? 정신과 상담 가기 그전에 수영 딱 한 달만 다녀봐? 평생을 운동치 몸치인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동, 그게 바로 수영이었다. 어려서 잠깐 배운 덕에 그래도 물은 무섭지 않고 몸은 떠오를 수 있을 테니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제껏 세 번이나 걸린 코로나, 수영 다니면서 한번 더 옮아와 걸린다고 해서 죽지는 않겠지. 싶은 마음에 접수일이 언제인지 바로 인터넷을 뒤져본다.
내일? 내일이란다. 마침 내일.
클래식하기 짝이 없는 이 동네에서 인터넷 접수라는 건 물정 모르는 소리. 현장 접수만 가능하단다, 그것도 새벽 6시. 오케이, 가는 거야.
다음날 5시, 새벽 공기를 가르고 출발했다. 혹시나 알람 소리를 못 들을까 곤두섰던 탓에 잠을 설친 푸석한 꼴로 마스크를 단단히 챙겼다. 이 작은 동네, 이 새벽부터 나온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싶어 걸음걸이는 여유만만했다. 얼른 신청하고 돌아와 눈 좀 더 붙이자, 마음은 가벼웠다. 금방 돌아올 거니 곤히 자는 남편을 깨워 사정을 설명할 이유도 물론 없었다
하지만 늘 예상은 빗나가는 법, 그 새벽에 30명도 더 넘는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서 너무 놀라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나만 답답하고 나만 뭐라도 해볼까 싶은 마음은 아니었나 보다. 사람들은 모두 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혹시나 잘리면 어떻게 하지 싶은 마음을 조리며 1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30명 정원의 신기초반에 간신히 등록했다. 다행히 내 앞에 서있는 몇몇 사람들은 성인반이 아니라 아이들 수업을 등록하러 온 덕에 나는 턱걸이로 몇 개 남지 않은 자리 중에 하나를 등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영 등록이 힘든 일인지 처음 느껴본 나는 집에 오면서 일단 등록은 성공했다는 뿌듯함과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육아하면서 아이들을 위해서 해줘야 하는 일이 아니고, 직장에서 돈을 위해 애써서 해주는 일이 아니고, 나만을 위한 새로운 일을 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드디어 결혼 10년 만에 나에게도 뭔가 배워야 할 일이 생겼고, 드디어 이동네로 이사 온 쓸모를 발견한 느낌이다. 매일매일 코로나에 지쳐있던 기분에 뭔가 설레는 기분이 처음으로 느껴졌다. 그래 원래 내 안에도 이런 느낌이 있었지. 맞아.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탈출구를 찾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