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Student
딸아이가 학교에서 시를 배웠다.
지금은 방학이니 방학 전까지 시를 배운 듯했다.
학교에서 시 쓰기를 매일 하는 거 같았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시 쓰기가 뭔가 어울리는 듯했다.
아이는 매일 학교에서 배운 시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설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시를 쓰고 그 시들을 모아서
그중에 순위를 매겨 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온 지 이제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는
말보다는 글이 자기를 표현하기에 좀 더 쉬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 3년 간 어학원을 다니며 하루 2시간씩 영어를 공부하고 왔지만
미국에서 아이의 말하기 실력은 드라마틱하게 늘지 않았다.
듣고 이해하기, 글로 쓰는 능력은 말하기보다는 좀 나아진 거 같기도 했다.
가을 즈음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던 아침
늘 틀어놓는 지역라디오 쇼에서는 MC와 3명의 게스트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아침 라디오 방송은 한국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두세 명의 게스트들이 나와 몇 가지 뉴스를 전하고 몇 가지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생활 이야기, 뉴스와 관련된 잡담들, 그리고 전화 연결된 청취자들과의 짧은 대화들이 이루어지는데
하하 호호, 낄낄 깔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물론 나는 웃음소리만 알아듣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MC의 굵직한 목소리 뒤에 따르는 환호성과 웃음소리.
역시나 그들이 왜 그렇게 놀라고 웃는지 알 길이 없는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뭐래는 거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
5초 정도 흐른 후에 뒷자리에 앉은 딸아이가 말했다.
- 엄마, 세계에서 이탈리아 여성이 가장 긴 혀를 가지고 있대-
아이는 늘 차 뒷좌석에서 역사책 같은 것들을 읽고 있기에
책에서 나온 정보를 전달한다고 생각한 나는
- 그래? 그런 이야기도 책에 나와? -
하고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통역해 준 것이었다.
놀라웠다.
그래도 내가 토익 듣기는 몇 개 안 틀린단 말이지.
그런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수다를 내 딸이 알아듣는다고?
많이 놀랐다.
그때 나는 아이들의 외국어 습득에 사용되는 뇌의 부위가 다르거나,
작동기제가 다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학교 친구들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듣는다거나
막힘 없이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언어 습득은 축적의 산물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듣기 능력은 다소 향상된
열 살짜리 여자아이가 학교에서 영시를 쓰게 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아이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아이는 반에서 4명에게 주는 시 콘테스트에서 4등을 했다고 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선생님이 주는 '특별상'인 듯했다.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내 아이가 어떤 시를 썼길래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궁금했다.
- 시 제목이 뭐야?-
아이의 가방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물었다.
아이는 많이 흥분해 있었다.
- 응. 제목은 new student 야 -
- New Student? -
- 응 전학 온 아이의 마음에 대해 썼어(뿌듯한 미소) -
- ...... -
제목만 들어도 알 거 같았다.
아이의 시를 직접 보지 못해 그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내 딸아이는 분명 머뭇거리고 수줍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런 자신을 대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시로 표현하였음이리라.
운율에 맞거나 아름다운 은유를 사용할 줄도 모를 것이고
적절한 단어를 풍부하게 활용하지도 못했을 터인데
그 안에 담은 마음만은 선생님의 가슴 한 편에 가 닿았으리라.
아이의 표정을 안다.
낯선 곳에 갔을 때.
자기 존중감이 떨어질 때.
귀를 접은 강아지처럼 축 내려앉은 눈꼬리.
엉거주춤한 어깨. 한껏 쪼그라든 등.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는 작은 발걸음까지.
나는 그 시 안에 마음 둘 곳이 없어 서성이는
New Student의 뒷모습이 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든 New Student 가 된다.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나를 밀어내는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내 앞에 버티고 선 거대한 불행의 벽 앞에서.
우리는 늘 새롭게 초라해진다.
겪어도 겪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감정.
New Student의 마음.
시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긴 문장으로 '그리고 그래서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
늘어놓지 않아도
내 안의 나를 단단하게 뭉쳐 밀도감 있게 내어 놓는 일.
그래서 언어가 완전하지 않은 외국인 여자아이도
선생님의 마음을 툭. 건드릴 수 있는 것.
나에게는 어렵기만 한 시이지만
산문으로만 남겨지기에
우리의 인생은 참 복잡하고 또 함축적인지도.
3주 전 노팅힐 북샵에서 집어온 Wendy Cope의 시집 <The Orange>에서
특별히 마음에 남은 시를 공유하고 싶다.
At 3 a.m.
the room contains no sound
except the ticking of the clock
which has begun to panic
like an insect, trapped
in a enormous box.
Books lie open on the carpet.
Somewhere else
you're sleeping
and beside you there's a woman
who is crying quietly
so you won't w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