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김혜수다 싶은 사극 드라마가 한창이다. 이는 실상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저 그 옛날 궁궐에서 일어났을법한 스토리에 현대인의 상상을 얹은 사극 판타지이다. 어디서 들 이런 고어古語들을 잘도 찾아내는 건지, 너무나도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이 드라마의 제목, '슈룹'은 '우산'의 옛말이라고 한다.
처음 드라마 예고편이 떴을 때, 그저 코믹한 궁중 '육아' 스토리인가 싶었다. 뭔가 '엄근진'할 것만 같은 궁궐 안에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좌충우돌 코믹 육아 이야기라면 뭐 그리 볼 게 있을까 싶더니만, 그래도 대 배우 김혜수가 선택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은 수작秀作이란 생각이 든다. 회를 거듭할수록 몰입도가 높아지고 있다.
중전 화령은 자신이 낳은 대군들을 치열한 왕권 쟁탈전에서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 애쓰는 걸 크러시 엄마로 등장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하겠다는 결연한 중전 엄마의 모습에 공감과 연민이 교차한다. 사실 요즘 현대에나 접할 수 있을법한 내용들이 조선시대에 입혀졌지만, 어차피 허구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그리 거슬리는 구석은 전혀 없다. 아닐 말로 우리 시대에 우리 맘대로 상상 좀 해보는데 어디가 덧나겠나.
방과 후 수업이 없는 화요일,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다. 선생님 인솔 하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걸어 나오는 아이가 웬일인지 엄마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다른 때라면 선생님께도 활달하게 인사하는 아이가 왠지 한풀 꺾인 듯 꾸벅 인사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을 보니 불현듯 나의 촉이 일어났다. 이 녀석 뭔가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건가 싶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물었다.
"우리 딸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
"오늘 별로 기운이 없어 보이네... 무슨 속상한 일 있었으면 엄마한테 말해주지...."
".........."
잠시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성질 급한 나는 지금 당장 얘기하라고 백번이라도 채근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지만, 아이의 마음을 다그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중에 말하고 싶어지면 엄마한테 얘기해줘.. 응?"
고개를 끄덕인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와 한결 기분이 나아진 아이에게 길을 걸으며 다시 얘기를 꺼냈다.
"이제 엄마한테 얘기해줄 수 있겠어?"
"응.. 뭐를?"
"응.. 아까 너 학교에서 나올 때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무슨 일 있었냐고 엄마가 물어봤었잖아.."
"아~ 그거어~~ 길에서 얘기하면 부끄러우니까 내가 집에 가면 얘기해줄게.."
아이의 말을 다 듣고 정리를 해보자니 대략 이러했다. 아이가 방과 후 수업에서 친해진 다른 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에게 우리 아이가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해서 불편하다며, 집에 가 자기 엄마한테 얘기를 했단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 반 담임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했고, 그 선생님은 우리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그 사실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쉬는 시간에 여러 차례 아이를 불러 정말 그런 행동을 했냐고 물어봤단다. 물론 당연히 선생님으로서 그리 하셔야 한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불쑥 나의 불쾌 스위치가 켜지기 시작한 부분은, 쉬는 시간이 총 세 번이 있는데 그 세 번을 다 불러서 같은 얘기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반응을 했느냐 차근히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는 정말 자기는 그런 행동을 한 일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정확하게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다시 차근히 얘기를 했다.
"OO아, 엄마가 너 야단치려는 거 아냐...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고, 엄마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히 알고 싶은 것뿐이고, 오늘 쉬는 시간마다 선생님이 불러서 너한테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 그러니까 그 얘기를 해줘 봐..."
다 듣고 나니 갑자기 속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싶다지만 그걸 세 번씩이나 불러서 물어보는 의도가 뭐지? 아이는 하지 않았다고 얘기를 했지만, 지속적으로 불러서 물어봤다는 건 네가 해놓고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으니 잘 생각해보고 솔직하게 인정하라는 건가?
울컥 화가 올라왔다.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아이에게 다시 얘기했다.
"엄마 생각에는, 쉬는 시간마다 불러서 얘기하신건 아마도 시간이 너무 짧으니까 차근히 얘기를 나눌 수가 없어서 그렇게 여러 번 부르신 걸 거야.. 그런데, 그렇게 계속 같은 얘기를 들으면서 너의 기분은 어땠어?"
"음.....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계속 얘기하니까 좀 놀라고 당황스러웠어...."
"응 그래... 안 했는데 자꾸 했냐고 물어보니까 억울한 마음도 컸겠다 그렇지?"
아이는 끄덕였다.
나는 우선 내 마음을 좀 진정시켜야 했다. 부르르 화가 나서 불쑥 선생님께 연락부터 하면 의도치 않은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화를 하기보다는 우선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늘 수고가 많으십니다.. OO랑 얘기 나누다가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 들었는데, 제가 상황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선생님께 여쭙니다. 쉬는 시간에 여러 차례 불러서 사실 여부 확인을 하셨다고 하는데요, 왜 그렇게 하셔야 했는지도 좀 알고 싶고요..'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시는 내용이 아이에게서 들은 내용보다 더 상세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그 내용이 그 내용이었는데, 나는 궁금했던 점을 여쭤봤다.
"그쪽에서 이런 내용을 전해온 이유는, 뭔가 사과를 받고 싶다던가 어떤 해결책을 바라는 차원에서 거치는 전반의 절차인 건가요?"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어머님, 그냥 이런 일이 있었으니 향후에 재발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차원입니다."
나는 한 숨을 고르고 말을 시작했다.
"선생님, 제가 아이와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눴어요. 아이는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이의 말을 믿어요. 물론 아이가 잊어버리고 잘못 얘기하는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아이의 기억은 정확할까요? 어찌 됐건 간에 혹여라도 그런 행동은 절대 하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일러두긴 하겠습니다만, 한쪽의 입장만 전하면서 아이가 하지 않은 행동을 마치 한 것처럼, 했다는 '전제'로 다음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어머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그쪽에 이런 내용을 전달해도 괜찮을까요?"
"네, 저는 선생님께서 이 얘기를 그쪽에 해주시면 좋겠어요."
나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아이들 간에 학교에서 오죽이나 많은 갈등 상황이 발생하겠나. 우리는 자라면서 안 겪어봤을까. 아이들은 그 속에서 부딪치고 경험하며 사회를 배워 나가고 있는 것일진대, 도대체 '그까짓' 별것도 아닌(하지도 않은) 행동을 아이 말만 듣고 쪼르르 선생님께 고해바치는 엄마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며, 그걸 또 재발하지 않게 주의해달라는 그 반 담임 선생님은 또 무엇이며, 그렇다고 사실 관계 확인한다며 아이를 쉬는 시간마다 불러대는 담임 선생님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솔직히 이 상황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아이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계속 불러댄 건 분명 아이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심했다는 뜻이다.
어디서든 눈치껏 알아서 잘하는 아이는 여태 단 한 번도 학교에서 돌출 행동을 한 일이 없었다.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계속 물으니, 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을 못 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단다(정치인도 아니고 이게 무슨...) 그래서 아이에게 타이르며 얘기해줬다.
"네가 하지 않았다는 걸 엄마는 믿어.. 그리고, 혹여 너는 나쁜 의도가 없는 행동을 했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생각하는 게 달라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오해할만한 행동은 애초에 하지 않는 거야. 그리고, 네가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저는 하지 않았어요!'라고 얘기해. 애매하게 기억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네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아니라고 얘기해야 해.. 알았지?"
아이는 다소 주눅이 든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보니 속상했을 아이의 마음에 나도 너무 속이 상해 왈칵 눈물이 올라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루 종일 그것 때문에 풀이 죽어 있었을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니 입술이 앙 다물어졌다.
자식을 위하는 엄마의 마음이야 현대의 엄마나 조선시대 중전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그 마음 어찌 모를까. 그러나 그 '뭐든'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 건 정말 큰 문제이다. 예를 들자면, 아이가 학교에서 기분 나빴던 일을 엄마가 담임 선생님께 쪼르르 얘기하는 그런 행동 말이다.
나는 여러 차례 글에서 밝혔지만, 우리 엄마는 자라는 내내 나를 위해서는 치맛바람을 휘둘러 주시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주 강인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랐다고 확신한다. 나 역시도 우리 딸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다. 그것만큼은 진정으로 필요한 결핍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분명하게 나의 생각을 선생님께 알려드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모든 일에 분별없이 나서는 천방지축 엄마는 싫지만, 우리 아이가 부당한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기꺼이 나설 것이다. 내 아이가 세찬 비바람을 홀로 맞고 있다면 나는 얼른 우산을 펼쳐줄 것이다.
나는 비를 맞더라도 아이를 위해 우산을 기울여주는 엄마의 마음을 과연 자식이 얼마나 알 수 있을까마는, 알아달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게 그저 엄마라서 하는 거니까.. 오래오래 우산 펼쳐주려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