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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초밥은 먹고 싶어

파랑고리문어 대소동

by Jane C

늘 죽음에 대해 관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일 당장 죽어도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결혼 후 나의 상식과는 너무나 다른 여러 일들을 겪게 되면서 가끔씩 아침에 눈뜨기 싫었던 날이 종종 생겼다. 심신이 최고도로 지쳐있을 때는 인간이 가장 짧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방법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도 있었다. 깨끗이 소멸되기엔 육체가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자주 했으니 한낱 '거적데기'에 불과한 취급을 받는 몸이 건강하게 작동될 리 없었다. 원인 모를 전신 알레르기, 갑상선 기능 저하증 등 면역저하 질병이 갑자기 몰려왔다.


어련히 모든 사람은 '죽음'을 가까이 생각할 거라 믿었다. 누구나 종국엔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소실을 향해 나아가지 않던가. 하지만 처음 정신과 상담을 하면서 정상적인 '건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죽음이나 자살, 소멸 같은 단어를 쉬이 떠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크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나의 마음은 '건강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다.


가족과 친구, 아무에게도 나의 현재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섣부른 걱정이나 염려, 사실은 연민이 더 진하게 가미되었을 그런 반응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우울증을 얘기하면 류머티즘 관절염을 말할 때보다 더 무거워지는 분위기 또한 피하고 싶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데이터만 있지 정작 가까이에 커밍아웃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도 '코로나에 감염되었다'는 말보다 더 꺼내기 어렵게 했다. 병증의 원인이 직장이면 그만두었을 테지만 사표 대신 이혼 합의서 내야만 하는 비혈연 가족이었으므로, 그저 좀 더 '잘' 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우여곡절 끝에 여기, 치앙마이에 와서도 이렇게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삶은 이다지도 공허한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아주 가끔 하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지나칠 만큼 쨍쨍한 햇살, 한차례 베고 뒤돌아서면 다시 정강이만큼 자라 있는 잡초,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자주 걷고 널어야 하는 빨래 등의 요소 때문에 금세 가벼이 걷혔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냉소적인 관점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풀어 얘기하자면 '누구나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거지 뭐가 유난이야' 하는.


하지만 얼마 전 우연히 나도 몰랐던 나의 진심 혹은 변심을 알게 되었다.

겨우 15밧 싸구려 초밥 때문에.



일본을 사랑하는 태국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의 식문화 또한 사랑한다. 당연히 '초밥'도 좋아하지만 바다를 접하지 않은 북부 산간지방에 위치한 치앙마이는 신선한 횟감이 귀해 고퀄리티 초밥을 먹을 기회가 드물다. 얼마 전 최대 쇼핑몰인 센트럴 페스티벌에 일본 회전 초밥 체인인 '스시로'가 오픈했는데 오죽하면 당일 웨이팅이 800팀이 넘었을까. 대신 여기 사람들은 어디서든 쉽고 싸게 초밥을 즐긴다. 수많은 야시장, 대형 슈퍼나 쇼핑몰에도 개당 싸게는 5밧, 대게는 10밧부터 시작되는 계란이나 맛살 등이 횟감 대신 올려진 초밥 코너가 있다.


더위를 피해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고 실없이 돌아다니다 체인이 여럿 있는 저렴이 초밥 코너 앞을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연어가 제법 실하게 들어 있는 초밥이 몇 개 보여 마침 연어회를 좋아하는 아이가 간식으로 사 먹자고 졸랐다. 밥을 먹은 지 오래되지 않았던 터라 각자 먹고 싶은 초밥 2개 정도만 고르자 했고 타코와사비를 좋아하는 나는 타코군함말이 하나를 담았다.

각자 고른 초밥으로 도시락 하나를 만들어 자리에 앉았다. 내가 고른 군함말이를 집으려는데 문어인지 주꾸미인지 모를 횟감에 반짝이는 은색 고리 모양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게 생겼네'하고 먹으려는데 아이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엄마, 그거 먹으면 죽어요!"


얼마 전 자기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 고리가 '파랑고리문어'의 문양이란다. 태국 어느 초밥집에서도 우연히 발견되어 기사가 나왔다고, 절대 먹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이가 구구절절 설명을 하기도 전에 '설마~'하면서 수상한 군함말이를 내 입안에 털어 넣은 지 오래였다. 그렇게 초밥을 씹으면서 그간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파랑고리문어'라는 생명체가 청산가리의 10배에 달하는 테트로도톡신을 가지고 있고, 만지면 안 되지만 먹으면 더더욱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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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파랑고리문어와 태국에서 어느 초밥집에서 발견되었다는 파랑고리문어 군함말이. 저렇게 생긴 은색 고리 문양 다리를 질겅거리긴 했는데... 어쨌든 지금 살아 있어요~



아이는 지금이라도 뱉어야 한다며 최선을 다해 핸드폰으로 각종 기사를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사진을 보니 정말 지금 내가 질겅거리고 있는 초밥과 같은 무늬가 아닌가. '청산가리의 10배라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뱉어볼까 아님 병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서 만일을 대비하기라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초밥을 끝까지 꿋꿋이 잘 씹어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래도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이내 '시즌 끝장' 세일을 한다는 어느 브랜드 매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죽음과 공존하는 쇼핑의 본능이여!)


가장 할인율이 높다는 행거에 서서 사지도 않을 옷들을 휘적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아이가 안 보이는 게 아닌가. 너른 매장 구석구석을 찾다 피팅룸 앞 기둥 구석 모서리에서 머리를 파묻은 채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의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눈물범벅.


"엄마가 죽을까 봐..."


웬 오버냐며, 그게 파랑고리문어면 입에 넣자마자 쓰러졌다고 말하니 아이의 기분은 금세 풀렸지만 순간 내가 오싹해졌다.

진짜 죽을까 봐.

이렇게 내가 조금이라도 어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연약한 존재를 두고 일찍 죽게 될까 봐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누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지만 나는 안 되는 거였다. 그게 나라면 절대 안 되는 거다.


뼈와 근육, 힘줄이 닳고 닳을 때까지 오래오래 힘내어 살아야겠다 굳게 다짐하며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무병장수를 빌고 또 빌었다.






예전에 좋아했던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중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라는 작품이 있다.


비 오는 오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죽어서는 안 되겠기에.




앞으로 나는 정신을 차리고

초밥을 먹으리.

먼지 한 톨만 한 은색까지도 두려워하면서,

진짜 파랑고리문어를 먹고 죽어서는 안 되겠기에.




PS. 제목은 백세희 작가의 에세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서 차용하였습니다.



Photo: Fuu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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