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배까지 아파오니 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신랑에게 어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지만, 간호사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의사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아니 응급실에 의사가 없다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뒤틀리듯이 아파오자 간호사들은 모르핀 주사를 놔주었다. 그 정신에 임산부인데 모르핀을 맞아도 되는지 물었고 그들은 괜찮다며 그 후로도 내가 너무 아파하자 한번 더 모르핀을 놨다.
그래도 점점 심해지는 진통 같은 통증. 몇 시간 여를 그렇게 침대를 붙잡아가며 통증을 참아 갈 때쯤 갑자기 아래로 울컥하며 무언가가 나온 느낌이 들었다. 순간, 무엇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며 의사를 불렀다. 아니 의사가 없었으니 그때에도 간호사들만 달려왔다. 나는 영어인지 한국말인지 모를 말들로 간호사들에게 아래쪽을 보라고 외쳤다. 그중 한 명의 간호사가 커튼을 치고 확인을 했고 밖으로 나가 그들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하더니 나에게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는 혹시나 정말 혹시나 했던 말을 내게 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13주 2일 만에 우리의 사랑의 결실인 사랑이가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그렇게 떠났다. 아이가 나오고 나니 신기하게 배 아픈 것도 사라졌다. 그저 황망함과 함께 무언가 억울함이 몰려왔다. 왜 도대체 아이가 이렇게 유산이 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해주지 않았는지, 왜 그 흔한 초음파도 해주지 않고 의사도 없이 유산기가 있는 임산부를 이렇게 혼자 유산하도록 방치해 뒀는지, 병원 응급실 베드에 누워있었을 뿐 모르핀 외에 내가 받은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게 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의 검진을 통해 미리 대략적인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것도 작은 병원이 아닌 오클랜드에서 몇 개 안 되는 종합병원에서 의사가 없고 양수가 터져 응급실에 온 임산부가 아무런 조처나 의사의 진단도 없이 혼자 아이를 유산할 수 있는 건지 나는 육체적 충격보다 정신적 충격이 더 컸다.
그들은 아이가 나오고 나서야 자기네 병원에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이 말을 왜 지금에서야 하는 건지.. 의사가 없었다면 진작에 나를 큰 병원에 보내줬어야 하는 게 맞지 않았는지...'
머릿속에는 이해 안 가는 거 투성이었지만 새벽 내내 나름의 산통을 겪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그 어떤 물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물어도 답이 없는 물음인걸 알았다.
그렇게 해가 밝아온 아침 나는 앰뷸런스로 다른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들이 내 차트를 받고 바로 나를 응급실 병상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간단한 신상확인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차 물었다. 나는 또다시 병상에 누워 하염없이 또 기다렸다. 그곳에서는 의사가 있다했고 이전병원에서 인계돼서 간 것이니 빨리 의료진을 만날 수있을 거라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또 무너졌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의사가 오지 않았다. 지난 새벽 이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 갈증이 났다. 물 한잔 마셔도 되냐고 묻자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금식을 해야 한다며 얼음하나로 입술만 적실수 있게 해 주었다. 점심이 지나도 의사가 오지 않았다. 재차 물었다. 이젠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의사가 이 병원에 있다고 해서 온 건데 의사가 있긴 한 거냐고, 나는 새벽에 아이를 유산하고 온 산모인데 언제까지 의사를 기다려야 하느냐고.'
그 와중에 이번엔 영어로 또박또박 컴플레인이 나왔다. 오히려 기다리며 정신이 맑아지니 하고픈 말이 다 나왔다. 그랬더니 간호사가 나름 친절하게 답했다.
' 미안, 너도 힘든 거 아는데 지금 의사는 너보다 더 심각한 환자를 보고 있어.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
그 말을 들으니 뭐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신랑이라도 밥을 먹고 오라고 보내고 난 힘없이 병상에 누워 또 기다렸다. 그리고 오후가 되고 하루가 저물어갈 때즈음 내 눈앞에 의사가운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 나이와 이름을 묻더니 본인은 주니어 닥터라고 소개했다. 나의 차트를 보았고 이전 병원에서의 기록과 아이가 나온 것을 확인했는데 자연유산이 잘 된 것 같다며 별다른 다른 조치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혹시나 며칠 배에 통증이 있을 수 있으니 진통제 일주일치를 처방해 주겠다고 하며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뭐지? 이게 끝이라고?' 그녀는 심지어 나를 진찰하지도 어떠한 소독이나 후처치를 해주지도 않았다. 밤새 혼자 아이를 유산하고 반나절을 기다려서 겨우 만난 의사에게 들은 말이 그냥 가도 된다는 말이라니..... 어제부터 뭔가 연타로 펀치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더 무언가 해줄 게 없다는데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병원을 나왔다. 지난밤부터 내 옆에서 나만큼이나 힘들었을 신랑과 그리고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우리 사랑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