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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현실이 되다.

끔에 그리던 그에게 연락이 오다.

by 해보름

그 당시 체력적으로 고된 일이었던 승무원을 그만두고 내 전공에 맞는 일을 하고자 주말마다 서울을 오가며 공부를 하고 있었던 나는 그다음 해가 돼서야 핸드폰을 보던 중 그 사람의 연락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전이라면 연락처가 있었어도 연락을 못했을 텐데 나이가 들어서 인지 아님 이렇게 연락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걸 알아서였는지 며칠 고민 끝에 용기 내어 연락을 했다. 그는 대학교 때 나랑 헤어지고 뉴질랜드로 유학을 떠나 12년이 지난 그때까지 영주권을 받고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4시간의 시차로 인해 내가 연락한 지 한 참이 지난 뉴질랜드 시간으로 아침시간이자 한국시간으로 새벽시간에 그에게로부터 답장이 왔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답장에 나는 그 간의 감정들을 풀어내기라도 하듯 아니 그와 어떻게든 다시 연락을 하고 싶은 나의 욕심을 채우려는 듯 쉼 없이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뉴질랜드에 정착을 한 건지, 돌아올 생각은 없는지 등등 궁금했던 질문들을 퍼부었다. 역시.. 나의 그런 급한 마음은 금세 드러나고 말았다. 그는 현재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어 연락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전했고 그렇게 그와 연락하며 지낸 며칠 간의 나의 설렘은 잠시 스치는 바람처럼 짧게 끝나버렸다. 하나의 기대감이라면 그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한국을 들어올 기회가 있는지에 대한 마지막 나의 물음에 그의 답변은 단호하게도 '노'였다.


"그래, 연락 닿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이미 지나간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구나"

나는 잠시였지만 설렘에 부풀었던 마음을 다잡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에게 연락이 오다


일 년쯤 지났을까? 나는 우연히 숨겨뒀던 그의 톡사진을 보게 되었고, 그가 한국에 나와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을 접자며 다잡았던 일 년 전 나의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나온 거지?' '한 번 연락이나 해볼까?' 마음을 비우고 나니 오히려 쉽게 연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 기대 없이 보낸 연락에 그는 의외로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동생 결혼으로 한국에 잠깐 나와있다며 언제 시간이 되니 한번 보자고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할렐루야!!'

오히려 마음을 비워서인지 아니면 그와 인연이었던 건지 어떤 인과에 의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그를 드. 디. 어 1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를 만나러 가는 날 택시 안에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생각하며 가슴 떨려했던 그 떨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꿈에서만 그리고 또 그렸던 그를 12년 만에 만났고 우리는 두 시간여 동안 그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번에는 그야말로 어떤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다. 정말이지 이 시간을 나에게 주신 것만으로 그간 내가 빌고 빌었던 하느님, 부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렇게 그는 뉴질랜드로 다시 돌아갔고, 나는 또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한 해가 지나고 12월 겨울이었다. 당시 영어 프리랜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던 나는 겨울방학기간에 열리는 대학교 합숙 특강 수업을 일주일 앞두고 수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책 위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에 '톡' 알림이 왔다. 언뜻 보니 그였다. 난 별 감흥이 없었다. 바쁘기도 했지만 한 번의 만남 후 뉴질랜드로 돌아가서 이제는 정말 나올 일 없다며 단칼에 끊고 간 그였기에 그런 그에게서 온 톡에 기대감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숨을 돌릴 때쯤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한국에 급히 나왔고 장례가 모두 끝나고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예상에도 없었던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와의 첫 만남은 내가 신들께 빌고 빌어서 들어주신 거였다면 이번의 만남은 보너스 같은 것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주신 선물 같은?? ) 이번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두 번의 만남을 갖게 되었고,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이것이 혹시 하늘이 다시 우리를 연결해 주려는 신호인가.'라고 생각하게 되어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가려는 그에게 혹시라도 계속 연락을 할 수 있을지 물었지만 그는 내 마음을 무색하게 하듯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제는 정말 다시는 한국에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 그래? 그렇담 이번엔 내가 가면 되지!"


근데 뭐지, 이쯤 되니 이번엔 오기가 생겼다. '그래? 그럼 내가 가면 되지? ' 그렇다.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그를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면 내가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바로 뉴질랜드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대학교 때 나 또한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도 했었고 이모도 살고 계셔서 사촌오빠를 보러 간다는 나름의 그럴듯한(?) 명목으로 그에게 나의 뉴질랜드행을 알리고 얼마 후 나는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래, 까짓것 함 가보자. 가서 그의 마음을 알아보고 그의 마음이 아니면
내 마음속에 있었던 그를 태평양 바다에 다 던져버리고 오자.'


나는 평소에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랑의 힘인지, 아님 12년간 후회의 마음으로 지내온 날들에 대한 보상인지 나는 그렇게 생에 처음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사냥꾼이 되어 뉴질랜드로 날아가고 있었다. 급하게 예약하느라 직항이 아닌 두 군데나 경유해서 23시간에 거쳐 나는 그가 있는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사촌오빠집에 지내면서 나는 그를 만났고, 그는 내가 그곳까지 온 것에 대한 놀람 혹은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다행히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 자주 만남을 가져 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잦은 만남과 연락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예정된 시간이 지나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어느 정도 진전된 관계로 나는 비행기표를 나의 일정에 맞춰 최대한 연기했다. 그러면서 늘어난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변한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았고, 20대 때 서로만을 바라보던 그 황홀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30대가 되어 더 어른스럽고 현실적으로 성장한 서로의 모습에 미래를 약속하게 되었다.



둘의 마음을 확인하자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이미 예정되어 있기라도 한 듯, 빠르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미 나와 그를 모두 알고 계셨던 양쪽 부모님들께서는 전화로 소식을 알려드리자 양 쪽 집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좋아해 주셨고, 진심으로 둘이 다시 함께 하게 된 것에 기뻐해주셨다. 그렇게 몇 달 후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3일 뒤 우리는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처음 그를 만나러 뉴질랜드로 가던 날 그의 마음도 나의 미래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뿌옇기만 했던 그날의 비행이 정확히 4개월 만에 핑크빛 현실이 되어 내가 그토록 꿈속에서 만나길 바랐던 사람과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외국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렇게 나는 한국땅을 떠나고 있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부푼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던 그날, 그날은 내 인생의 꿈이 이루어지던 날이자 앞으로의 나의 인생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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