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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한 외침!

by 해보름

어릴 적부터 나는 둘째여서 그런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노래를 부르곤 했다. 엄마가 쇼핑을 나가자고 한 주말, 일이 생겨 나가지 못하게 되면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나는 '왜 약속을 하고 안 지키는 거냐?' 며 엄마가 지칠 때까지 계속해서 묻고 졸랐다. 엄마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지만 그 당시 어린 나의 마음에 그 이유는 나의 실망감을 없애줄 만큼 크지도 타당하지도 않았다. 커서도 나의 이런 집착에 가까운 외침은 '내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마다' 이어졌다.


지방 광역시에 살았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상위권 대학은 아니더라고 서울의 대학교에 지원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만류로 그 희망이 꺾이자 대학 내내 대학 졸업만 하면 서울로 갈 거라며 '독립, 독립'을 독립투사처럼 외치고 다녔다.



우리나라 최고의 항공사에 들어가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졸업 후 취업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없었다. 우리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은 이과생 특히 경영학 전공자를 뽑았다. 공채가 나오는 족족 지원을 해도 서류통과자체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예상외로 전공을 보지 않는 은행권에 운 좋게(?) 합격을 하게 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6개월 만에 퇴사하고 내가 하고 싶은 나에게 맞는 일을 하고자 국제선 승무원에 지원하게 되었다. 한 차례 낙방 후,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항공사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우리나라의 많은 20대 여자들이 꿈꾸는 로망의 직업을 갖고 드디어 내가 그토록 원하던 서울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땐 부모님께서도 그렇게 외치더니 결국 이뤄냈다며 나의 독립을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그 후 5년간 다니고 싶었던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누비고 다니며 20대를 그렇게 꿈을 이루며 보냈다.




스케일이 커진 나의 외침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새로운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자유로운 나의 성향 때문이었을까?' 30대가 들어서면서 나의 또 다른 '꿈을 위한 외침'은 이제 서울이 아닌 외국이었다. 외국 나가서 하고 싶었던 공부도 더 하고 싶고, 한국 회사와는 다른 외국 회사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한국이 아닌 외국, 정확히는 영어권 나라에서 살고 싶었다. 생각하면 막연한 듯싶고 멀게만 느껴져 마음속 그 어딘가 속에 숨어있다가 사라져 버릴까 봐 난 더 크게 외치고 다녔다. 그래야지만 그 꿈이 나한테 한 걸음씩 가까이 오는 것 같았기에..


그렇지만 이번엔 현실이 내 편이 아닌듯했다. 20대 후반에 건강상의 문제로 4년 여간의 승무원 생활을 마치고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던 나는 부모님의 권유로 다시 서울을 떠나 광역시인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다. 그 사이 경제적인 문제까지 겹쳐 외국 유학을 가고자 했던 나의 꿈은 그렇게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설상가상으로 30대가 되면서 결혼을 더 늦기 전에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죽도록 하기 싫어했던 소개팅에 주말마다 나가야 했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웃으며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살 터울의 친언니가 "너 00 오빠 연락처 있는데 줄까? 연락한 번 해볼래?"라는 말에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대학교 때 이후 10년 넘게 내 가슴속 안에만 존재했던 사람, 감히 보고 싶다고 입 밖에 낼 수도 없어 매일밤 머릿속에서 수십 번, 수천 번 그려보고 또 그려보았던 나의 연인이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 올해까지는 바쁜데.. 음. 일단 연락처는 줘봐~


서로의 고민을 다 털어놓는 친언니였지만 그런 언니한테조차 그간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마음을 숨기고 지냈기에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연락처를 받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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