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다른 엄마면 좋겠어.”
4살 딸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때 나는 출간을 한 달여 앞두고 있었다. 초고를 마친 후 퇴고와 공동 작업에 들어간 시기였다. 이제는 내 글만이 아니라, 책 한 권 전체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작가들의 글까지 함께 검토하고 맞추어야 했다. 띄어쓰기, 맞춤법은 물론 주석과 인용까지 챙겨야 했고, 줌으로 모여 서로의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도 이어졌다.
각자의 글을 깊이 있게 완성해내야 하는 개인 글쓰기와는 달랐다. 후반 작업은 다른 작가들과 호흡을 맞춰 공동의 하나의 것을 만드는 합작작업이었기에, 나 혼자만 빠질 수 없었다.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기는 날도 많았고, 잠과 밥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결코 뒤로 밀 수 없는 우선순위가 있었으니, 바로 네 살 난 딸이었다.
“엄마 글 써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아직 어린아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놀이터에 들르고, 간식을 먹으며 TV를 보던 한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나와 놀고 싶어 했다. 줌 화면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자꾸만 자리를 비워야 했다. 아이는 처음엔 잘 참고 기다리다가도 이내 심통을 내곤 했다.
“언제 놀아줄 거야? 엄마는 나랑 안놀아주고 왜 맨날 공부만 해?”
그 말에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남편이 집에 오면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그는 아이와 저녁을 먹고 함께 놀아주었고, 나는 다시 줌 앞에 앉았다.
그러다 2주간의 방학이 찾아왔다.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갈 여유가 되지 않아 아이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했다. “엄마 같이 놀자!” 오전에 잠시 TV 보는 시간이 끝나면, 아이는 숨바꼭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잡기놀이 등 몸으로 뛰어노는 놀이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함께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줌에 참여하던 중 아이가 방에 들어와 말했다.
“엄마가 다른 엄마였으면 좋겠어.”
순간 숨이 멎었다.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히 반복했다.
“엄마가 다른 엄마였으면 좋겠어.”
‘왜’라는 질문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명백히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아이는 지금의 내가 싫었던 것이다. 몇 달째 엄마와 함께 놀지 못한 서운함이 결국 ‘엄마 전체의 부정’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순간 현타가 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과연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아이를 위한 정신을 남기고자 글을 쓰고 있지만, 정작 현실의 나는 엄마와 가장 정서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어야 할 나이의 아이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었다. 사실 이런 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글쓰기에 몰두하던 초반에도 아이는 내게 이런 서운한을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번 말은 달랐다. 아이가 충분히 의미를 알고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놀이를 통해 그리고 부모와의 정서적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아이가 그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하니 아이에게 영향이 크게 온듯했다.
지금 하는 일은 공저작업이고, 정해진 날짜에 출간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개인적인
희생은 모두에게 필요했다. 그러나 그 희생이 온전히 나만이 아닌 주위가족들에게도 요구해야 하는 희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이해를 할 수 없는 아이에게까지...
아이의 말을 듣지 않은 걸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 혼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아이는 그만큼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해야 했다.
나는 아이의 눈을 보며 물었다.
“OO야, 엄마가 놀아주지 않아서 속상했어?”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이를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지금 두 가지를 다 잡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 기회는 내게 너무도 소중했기에, 끝까지 해내야 했다. 다만 끝낸 후에는 반드시 아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네가 조금 더 자라 글을 읽을 수 있고, 엄마가 쓴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엄마가 설명해 줄게. 이 일이 엄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왜 엄마가 지금 너와 놀아주지 못했는지. 이 글쓰기가 엄마 스스로 서기 위해, 그리고 엄마가 서나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만, 지금의 엄마를 용서해 줘.’
잠든 딸을 바라보며 혼자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글을 쓰며 서 있는 지금의 나와, 엄마를 원했던 아이의 마음 사이에서 나는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흔들림조차 내가 자립해 가는 과정임을.
그리고 언젠가 나의 아이도 알게 되길 바란다.
자립은 완벽하게 흔들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자기 길을 지켜내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