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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보름 Dec 31. 2023

수액 좀 놔주세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까이에 있을 때는 그것의 진면목을 알지 못해 소중함을 간과하기 쉬운 법이다. 그러나 시간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게 되면 보지 못했던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과 내가 살아온 환경을 새롭게 보고 싶다면 가장 좋은 것이 여행일 것이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몇 달을 타지의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는 것은 나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고, 내가 살던 곳도 새로이 인식되게 하는 힘이 있다. 요즈음은 다른 나라 혹은 다른 도시에서 '일 년 살아보기'와 같은 것들이 유행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도 한 번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지 않을까? 일 년 이상,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내가 살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산다는 것은 여행보다 더 깊은 삶과 나의 지난 환경들, 살아온 것들에 대한 가치관까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여행을 넘어 일 년 살기, 그리고 더 크게는 이민과 같은 다른 환경에서 사는 경험들은 책에서의 경험보다 훨씬 더 크고 값진 경험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은 저번 글에 이어 뉴질랜드의 병원과 의료시스템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난 체력적으로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미리미리 예방하려는 성향과 한국의 훌륭한 의료 덕분에 한국에 사는 동안은 병원에 입원하거나 하는 큰일이 없이 지내왔다. 그러나 웬일인지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는 임신과 유산, 출산이라는 특수한 상황들이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꽤 자주 병원 응급실과 입원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는 결혼 6개월 후 첫 아이를 갖고 나서였다. 아이를 갖었다는 기쁨도 잠시 6주 때부터 찾아온 입덧으로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울렁거림 속에서도 초반에는 음식이 당겨서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먹었는데 몇 번 체한 느낌이 들더니 그 후부터는 속에 바위가 들어찬 느낌이 들어 음식은커녕 물조차도 삼키기가 어려워져 하루에 겨우겨우 먹을 수 있는 게 물 반잔정도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담당 미드와이프에게 물어보니 자신이 다른 조치를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정 힘들면 응급실에 가서 수액을 맞으라고 했다. 그때부터 신랑이 일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 응급실에 가는 루틴이 시작되었다. 응급실에 가서 나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나면 수액을 놔주었는데, 그것은 말 그. 대. 로. 수분만 들어있는 수액이었다.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단백질이나 비타민, 칼륨 등 어떤 영양성분이 든 수액이 아닌 그저 물로만 된 수액만 놔주었다. 그러다 보니 맞을 때는 수분이 들어가서 조금 나은 듯했지만 맞고 나서 하루만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맞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물뿐인 수액으로 버텨갔다. 그렇게 몇 주 지났을 때 (응급실이다 보니 매주 갈 때마다 응급실의사가 바뀌었는데) 한 번은 인도인 남자 의사였는데 그날 맞은 수액은 전과는 달리 맞고 나서 훨씬 컨디션이 좋았다. 신랑도 나를 보더니 해골 같은 모습에서 얼굴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며 신기하 다했다. 그래서 의사에게 어떤 수액인지, 전에 맞던 것과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하니 그 의사는 칼륨이 들어있는 수액으로 처방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물로 된 수액만 맞다가 칼륨이 들어간 수액을 맞으니 그 효과는 너무 좋았다. 우선 맞고 나서 내가 봐도 피골이 상접했던 내 얼굴이 살이 오른 듯 보였고 집에 와서도 3~4일은 음식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 크래커나 과일, 주스 종류이긴 했지만 거의 한 달 만에 물 이외에 음식이 들어가니 그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이번에 응급실에 가면 꼭 칼륨이 든 수액으로 놔달라고 해야지!

그날부터 신랑 일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 될 때까지 내 머릿속엔 '칼륨' 밖엔 없었다. 그것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 어떤 기제로 나아졌는지 따위를 알 여력도 없었던 나는 그저 '칼륨'을 맞아야 앞으로 남은 임신기간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돼 어김없이 방문한 응급실에서 나의 상태를 묻는 의사에게 나는 임산부이고 심한 입덧으로 음식과 물을 전혀 섭취하지 못해 수액을 맞으러 왔다고 이야기하고는 저번에 칼륨이 든 수액을 맞아 효과가 좋았는데 그 수액으로 놔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이번 의사는 단호했다. 너의 피검사 수치상 칼륨은 필요하지 않으니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쉽고 아쉬웠다. 비용을 부담하고서라도 맞고 싶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그러나 단호한 의사는 일반 수액을 처방해 주고는 자리를 떴다. 그렇게 원래 맞던 물로 된 수액을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주도 그 다음도 나에게 한 줄기 빛을 가져다준 '칼륨' 수액을 그 후로 맞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응급실을 다닌 지 8주, 아이가 13주가 되던 날 여느 때나 다름없이 일반 수액을 맞고 집에 돌아온 새벽, 나는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껴 다시 응급실로 향했고 5시간 만의 몸부림 끝에 아이는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힘들어하는 엄마의 몸에서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아이는 나에게 온 지 13주 만에 이별을 하고 다시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척박한 의료환경 속에서 나와 다시 찾아올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나는 매일 산책을 시작했고, 곧 헬스장에 등록했다. 헬스장에 등록한 것도 처음이었고, 매일 걷기와 근력운동을 한 것이 평생 처음이었다. 운동은 매일 나의 루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갔고 운동과 함께 밀가루와 고기를 줄이고 야채와 곡물위주로 소식을 하며 식습관도 바꿔나갔다. 그러면서 몇 년이 지나자 다시 아이가 찾아왔다. 너무나 소중했다. 그만큼 이번에는 이 아이를 잘 지켜야 했다. 저번에 나라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미드와이프의 케어에 많이 실망했기에 이번엔 우리가 비용을 내어 출산 때까지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케어받을 수 있는 산부인과 병원에 예약을 했다. (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부인과 전문의를 임신기간 내내 만나고 출산도 산부인과 전문의가 맡아서 해준다. 그러나 많은 뉴질랜드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대부분은 미드와이프 서비스를 받는다. 미드와이프에게 케어를 받고 아이를 낳는 것은 정부가 보조를 해주므로 무료이다. ) 산부인과 전문의는 나의 나이와 이전의 유산경력을 고려하여 입덧이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입덧약을 처방해 주었고 그래도 심해지면 가까운 곳에 가서 바로 수액을 맞을 수 있도록 처방전까지 미리 써주었다. 확실히 전문의에게 케어를 받으니 달랐다. 그렇다 보니 심리적으로 안정도 되었고 운동을 해서 체력도 보충을 해놓아서 인지 다행히 입덧도 많이 심하지 않게 지나갔으며 임신 중기, 말기도 큰 문제 없이 보낸 후 자연분만으로 출산을 하게 되었다.


 출산 후 100일 즈음 지났을까?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시지 못한 채 신랑과 오롯이 둘이 아이케어와 산후조리를 해야 했었기에 아무래도 나의 몸은 뒷전이 되었고 신랑이 휴가를 끝나고 회사에 다시 나가면서부터는 밤낮으로 온전히 혼자서 아이를 케어해야 했다. 주말에는 신랑이 새벽에 아이 수유를 맡아주었지만 평일에는 새벽수유까지 혼자 하다 보니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잠이 부족한 게 쌓여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지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가 100일이 지난 어느 날 아이를 수유하고 배시넷에 앉혀두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가슴을 부여잡았고 그 상태로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맡에 아이가 엄마의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울기 시작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아이를 토닥일 수도 없었다. 간신히 옆에 핸드폰을 부여잡고 신랑에게 전화를 했고, 회사에서 바로 나올 수 없는 신랑은 111에 신고를 해주었다. 잠시 후 앰뷸런스가 집에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은 나를 바닥에 눕히고 심장부위에 패드를 붙이고 심장박동 검사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응급실에서 나머지 심장검사와 피검사가 이루어졌다. 한참 후 의사가 왔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물었다. 나는 숨 쉴 수 없이 가슴이 조여왔고, 그 후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쓰러졌다고 이야기했다. 의사는 다 듣더니 답했다.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심장도 정상이고, 피검사도 모두 정상입니다.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느끼는 나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져 있었고, 내 체력의 한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나는 의사에게 이러한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체력적으로 너무 힘든 상태이니 모두 정상일지라도 영양제 한대 놔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답했다.


 육아로 인해 잠이 부족해서 힘드신 상태이군요. 그렇지만 검사상 모두 정상이니, 물 한잔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주위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세요.


  이렇게 야속할 데가 있을까? 영양수액이라도 한 대 맞으며 눈을 좀 붙이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허황된 망상에 불과했다. 출산 때도 분만실에 들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수액을 놔주고 아이가 나옴과 동시에 남아있는 수액을 빼버리는 나라였다.






 입원하면 검사를 하기 전에 상태를 보고 우선 수액부터 꽂아주는 한국과 달리 뉴질랜드는 환자의 상태가 심각해 보이더라도 검사상 필요하지 않으면 그 어떤 수액 처방도 나오지 않는 나라이다. 그래서 오죽하면 뉴질랜드 병원은 죽기 직전까지 가야 치료해 준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동네 병원만 가도 아미노산에 비타민 주사에 피로해소를 위한 마늘주사, 감초주사등 종류도 많은 수액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 병원에선 값이 가장 저렴한 수액이라 하더라도 물만 든 수액은 없었다. 적어도 기운을 차릴 수 있는 포도당이 든 수액을 놓아준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한국의 병원들은 그래왔다. 한국의 영양제가 듬뿍 든 영양수액이 절실히 생각났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바닥이 난 내 몸을 스스로 추스르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집에 와서 물 한잔 마시고 또다시 아무도 없는 끝없는 육아가 시작되었다.


 지금 나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가서 내가 원하는 수액을 처방받아 맞을 수 있는 한국에 있다. 실제로 한국에 와서 나는 한동안 수액요법으로 치료를 받았고, 지금도 한 번씩 힘들 때는 수액을 맞곤 한다. 그러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처럼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몸이 추스러진 다음에는 운동을 하고 식이요법을 하는 것이 병행이 되었고 그러고 나서는 운동과 식이요법이 주가 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정 힘들거나 체력적으로 필요할 때 한 번씩 도움을 받지만 이제는 의료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뼈아픈 경험을 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내 몸을 스스로 지키려 한다. 가까이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을 누릴 수 없음을 경험한 것은 나의 삶에 큰 경종을 울렸다. 그런 것들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미리 알게 되고,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나에게 가장 값진 경험이었다.




 (Feat. 뉴질랜드에서 이렇게 수액치료 뿐 아니라 나름 '과잉진료'라 불리는 것을 해주지 않고 정말 꼭 필요한 진료와 치료만을 해주는 이유는 뉴질랜드에서 의료비는 영주권자 이상 뉴질랜드 시민들에게는 정부가 보조를 해주어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임신과 출산도 정부지원을 받아 미드와이프 케어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원하면 따로 돈을 내고 전문의에게 진료를 보아도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일반적인 질병으로 뉴질랜드에서 전문의를 보는 것은 GP라 불리는 일반의에게 소견서를 받아야 하고 미리 예약을 해야 해서 돈을 내더라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한국처럼 아프다고해서 바로 전문의를 보러갈 수는 없다. 그리고 참고로 얼마 전 뉴질랜드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뉴질랜드에서도 이제 수액을 맞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젠가 돌아갈 곳이기에 그곳의 나아지는 의료소식에 기쁨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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