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식사 때 자주 올라오던 음식이 청국장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사는 대식구였고 아이들의 입맛보다는 어른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시대라 하루 건너 한 번꼴로 밥상 위에 등장했었다.
그때 그 냄새 역한 찌개가 우리 집에선 담북장이라고 불렸고 한참 후에야 그것이 충남에서 청국장을 이르는 말인걸 알았다.
딱히 내 입맛을 사로잡는 반찬이 없는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청국장을 먹었다.
그것이 유년시절 청국장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고 조부모님이 돌아가시고부터는 아버지가 청국장 냄새를 싫어하신 까닭에 다행히 밥상 위에서 멀어졌다.
내가 대학을 졸업 한 해는 1989년, 그쯤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난 것 같다. 입사 시험에 두, 세 번 떨어지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요즘 돌이켜 생각하면 좀 오글거리지만-난 꿈이 현모양처였다.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연애하면서 처음 먹어 본 것이 피자, 파스타라는 이름 생소하고 낯선 이국의 음식이었다.
처음 접하는데도 입에 잘 맞았다. 그중에도 이태리의 국수 요리로 통하는 파스타는 면류를 좋아하는 나에겐 취향저격이었다. 밝은 성격과 화목한 집안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그처럼 이국의 음식도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연애기간을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1년 반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결혼생활 3년은 남편의 늦은 학업으로 프랑스에서 보냈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나는 매 끼니가 골칫덩어리였다. 그래도 눈썰미와 새댁의 의욕 넘치는 패기로 한국 마켓, 중국 마켓에서 식품을 구입해 직접 어설프게나 김치를 흉내내기도 하고, 결혼 전 먹던 음식들을 비슷하게 재현해서 향수를 달랬다.
그래도 재료비가 비싼 탓에 우리가 자주 이용하는 음식은 만만한 게 파스타였다.
마켓에서 토마토퓌레나 크림소스만 구입하면 갖은 야채, 간 고기 아니면 해산물을 넣어 짧은 시간에 조리해 샐러드랑 먹으면 한 끼 식사로 제법 근사하고 든든했다.
남편은 음식 투정은 없는 사람이었다. 타국에서 지내는 그 기간도 줄기차게 싸워댔지만 음식 타박만은 하지 않았다.
고국에 돌아오고 2년간 시댁에 얹혀살았다... 그 기간 동안 친구들을 좋아하는 남편은 거의 밤 12시를 넘겨서 들어오기 일수였고 난 외롭고 힘들었다.
신혼생활 어설프게 혼자 익힌 음식 솜씨는 워낙 솜씨 좋으신 시어머니 덕에 많이 다듬어졌다.
시아버지 사랑은 며느리 사랑이라는데, 나는 그 복마저 내게 아니었나 보다. 군인 출신 시아버지는 엄격하시고 무서웠다.
어느 날은 아침에 아버님 보시기 전 먼저 신문을 펼쳐서 눈물이 쏙 빠지게 혼난 적도 있었다...
부모님과 같이 사니 파스타를 만 들일도 없었고,
남편과 외식할 일도 거의 없었다.
함경도가 고향이신 두 분은 된장찌개는 거의 매일 드셨는데, 청국장은 다행히 드시지 않아 내가 고 냄새나는 것을 끓일 일은 없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독립해 분당에서 둥지를 틀었고 이혼하기 전까지-현석이가 스물둘 군대 입대하던 해-그곳에서 거주했었다.
아이 아빠 하고는 결혼 후 3~4년은 치열하게 싸웠고, 아니 연애 기간 포함 5,6년은 죽기 살기로 싸웠고... 그 후로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서른 중반부터는 거의 아이와 둘이 밥 먹고, 놀고, 외출하는... 그런 일상이었다. 그도 나름 열심히 일에 매달렸지만, 성과도 없었고 지독히 운도 따라 주지 않았다.
아이도 파스타를 좋아했다. 집에서 직접 만들어 주기도 가끔은 외식으로 먹기도 했다.
남편과 아빠의 부재는 이웃사촌들과 친구들에 의해 조금은 메꿔졌다.
지나고 보면 어려운 가운데도 그 시절 참 좋았던 것 같다. 거의 매일 우리 모자를 의리의 이웃은 자기 집으로 불러 내어 엄마들은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은 놀이를 하고 그렇게 그 시절을 보냈다. 그중 솜씨 좋은 지현 엄마의 청국장은 이상하게도 냄새가 역하지도 않고 구수하니 내 마음을 달래주었다.
즐거웠던 시절은 잠시 남편의 채무로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했다. 이웃동네로 가는데도 동기들 같아 눈물이 앞섰다.
나는 살면서 마음이 빚을 친구들에게 많이 지고 살았다. 남편은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랑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열 번도 넘는 이직에, 세 번의 사업 실패...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다른 그림이 그려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힘든 시기에 친구들은 서로 짠 모양 쌀과 고기를 사다 주기도, 과일과 생필품을 그리고 정성스레 만든 김치와 청국장과 제육볶음 등을 싸주었다. 또 어느 날은 가족들 놀이동산 가는데 현석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다.
혼자서 암 수술하러 간 날, 저녁. 간병비 하라고 내민 봉투... 돈의 가치가 아니라 그냥 든든해서 울었다.
나의 지나 온 시절은 가족과 지인들의 사랑으로 빚은 삶이다.
혼자 있으면서 살기 위해 매일매일 음식을 만든다. 음식엔 기억이 있고 추억이 있다.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동안 이혼하고 몇 년간은 그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와 나는 파스타와 청국장만큼 이질감 느껴지는 존재인데, 처음엔 그 다름이 매력으로 작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다르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했고 헤어지게 됐다.
처음 몇 년은 내 인생이 실패한 것을 그의 탓을 하며 그를 떠올릴만한 것은 애써 외면했다.
몇 년이 지난 후 시내에서 절친과 점심 약속을 했다. 한정식을 좋아하지만 강남역 부근에는 우리가 갈 만한 한정식 집이 없었고, 점심시간이라 가는 곳마다 붐볐다.
두세 집을 거쳐 들른 곳이 파스타집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 앉아 메뉴판을 보는데, 처음 보는 조합의 메뉴가 있다. 청국장 크림 파스타~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
좀 느리고, 미숙하고 어리바리한 나...
삶에는 치명적인 성격이다.
미움과 원망이 참 부질없게 느껴진다.
다르다는 것도 이렇게 조화로울 수 있는데, 왜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했을까?
혼자 사는 나는 먹는 게 큰 숙제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아직도 가끔 중간에서 만나 반찬을 전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 돌아가신 조부모처럼 청국장을 즐겨 먹고, 밥하기 싫은 날은 간편식 파스타를 해 먹기도, 국적불명의 잡탕 스튜를 끓이기도 한다.
음식은 삶이다. 내가 걸어온 길이다. 오래 살고 싶은 맘은 없어도 건강하게 사는 날까지 살다 가고 싶다. 골고루 편식 없이, 편견 없이, 조화롭게 이것이 나의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내건 슬로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