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가 느껴지는 12월의 저녁이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것은 매번 숙제를 하는 것같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건강을 생각하면 '잘 챙겨 먹어야지.' 하다가도 스스로를 위해 번잡스러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좀 뻘쭘하기도, 귀찮기도 해 종종 나가서 외식을 한다.
음식 솜씨가 없는 편은 아닌데, 혼자 지내면서 대강 먹다 보니 영 이전만 못하다. 어쩌다 오는 아들 생각해서 기껏 집밥을 차려 줄라 해도 아들은 내가 수고할까 걱정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자취하면서 사 먹는 밥에 길들여져 있어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집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피자 위주의 음식을 주문한다.
그러니 당연히 음식을 조리하는 것과는 멀어져 갔고 예전의 손맛도, 자신감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집안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새 시간이 정오를 가리킨다. 조카들이 기다릴 것 같아 서둘러 채비를 마쳤다.
참 이상한 일이다. 일을 할 때는 제발 한 달만 쉬어봤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정작 몇 달째 쭉 쉬고 있다가 주어진 단기 알바(주어진 기간 한 달)라도 나가게 되니 그간의 무거웠던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이런 편안한 느낌은 오랜만에 일을 다시 시작한 것도 있지만... 내가 조카들을 사랑하고 예전에 돌본 경험이 있다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익숙한 일을 하는 것은 당연히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확실히 2,3년 전과는 다르게 내 삶의 태도가 변화했다는 것에 기인한다.
그전에는 조카들을 돌볼 때는 직업이란 역할에-의무감과 책임감을 더 중시-더 충실했기에 일을 할 때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 마음의 상태가 바닥인 경우였으나 내가 가장이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은 똑같은 과제의 일이라도 즐겁고 감사하다. 그동안 나의 삶의 태도는 건강하게 바뀌었다...
무엇이 나를 달라지게 했을까?
글쎄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삶에서 자유로워지니 감사함이 나를 찾아왔다. 심신이 조금씩 회복됨을 경험하며 내가 가지지 않은 것보다는 내게 있는 것에 집중하니 불행하다에서 행복하다는 말도 자주 되뇐다.
"이모 왔다~~"어김없이 일터를 들어가며 외치는 첫마디이다. 그러면 조카들은 제 할 일을 잠시 멈추고 내게 인사를 한다. 큰 놈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작은놈은 살가운 포옹으로... 나는 두 아이 각자 스타일 그대로의 인사법, 나는 모두 만족한다. 들에 나는 들꽃도 각기 모습이 다르듯 하물며 사람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젤 먼저 손을 씻고 앞치마를 착용하는 것으로 나의 일과는 시작된다.
내가 예전처럼 애들의 식사를 담당하러 올 거라는 동생의 말에 조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동안 못 먹었던- 내가 즐겨했던 메뉴를 기억하며-메뉴들을 내가 오는 날짜별로 적어 놓았고 동생은 그에 맞춰 장을 보아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내가 다른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이모의 손맛을 추억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음식 솜씨에 자신이 없어진 나도 급 자신감이 붙었다. 조카들의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이모표 만능 손으로 변신을 준비했다. 짠~~
조카들이 짜준 메인 식단은 내가 1~2년 사이 나를 위해 한 번도 차려보지 않은 음식들이었다. 보통의 가정집에서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난 나를 위해서는 조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계란말이, 낙지볶음, 김치볶음밥, 떡볶이, 야채튀김, 수제비, 보쌈...
오래전에 요리랑 담을 쌓아서 어려운 조리과정이 필요한 음식은 아닌데, 걱정이 앞선다. 이모의 손맛을 기대하고 있을 조카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조카 큰 아이랑 작은 아이는 성격이 정반대다. 성격만큼 식성도 많이 다르다. 중학교 3학년인 여학생 큰아이는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아 샐러드류를 좋아하고 수제비 같은 별식을 좋아하는데, 작은 조카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는 오징어, 낙지류, 오직 밥 종류의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점심준비를 할 때 두 가지 메뉴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유일하게 둘의 기호가 일치하는 음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제일 쉽고도 간단한 계란말이이다. 만만해 보이지만 직장일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동생이 서, 너 가지의 채소를 곱게 다져 계란말이를 해주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잘해야 계란 프라이 정도 만들어 주었겠지...
정성을 다해 재료를 다진다. 이모의 사랑과 동생의 아이들을 향한 사랑도 추가로 넣고 휘휘 젓는다. 적당히 달군 팬에 기름을 넣고 붓는다. 불 조절을 약하게...
작은 아이가 엄지 척하며 "이모 사랑해요!" 한다.
큰 아이에게는 내가 묻는다. "어떠니?"
"이모 낼 또 해줘~~"
최고의 찬사다.
전날도 저녁에 남은 계란말이를 서로 더 먹겠다고 다툰 모양인데, 앞으로 조카들은 계란말이 하면 이모를 떠올리지 않을까? 이놈의 인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 같다. 호호
나는 여전히 집에 오면 음식을 잘해 먹지는 않는다. 간편식 식사에 영양을 고려해 과일과 채소 요구르트 정도를 추가한 식단이다.
그러니 음식 솜씨는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아니 퇴보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다. 조카들 한테만 가면 나는 없던 솜씨도 살아나는 만능의 이모 손이 되어 조카들 입맛을 즐겁게 한다.
내일은 둘째가 낙지볶음을 기대하며 목을 쭉 빼고 있겠지... 첫째는 내가 떠난 후 한 번도 제대로 된 수제비를 맛보지 못했다고 한다.
아, 나도 조카들의 기억 속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모 하면 떠오를 맛-계란말이와 떡볶이 그리고 낙지볶음...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슬퍼서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불행인 줄 알고 내던졌었다."
아이리스 머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