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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함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프레임 리터러시 : 열 번째 이야기

양자역학으로 인생을 고백하다.


며칠 전, 한 세바시 강연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과학자가 양자역학에서 배운 삶의 태도'라는 제목으로 정연욱 성균관대학교 양자정보공학과 교수가 약 15분간 강연을 하는 영상이었다.


그동안 몇 번 시도하다가 중간에 덮었던 어려운 과학 책들과 달리

이번에는 과학에 철학이 있고 위로가 있어 끝까지 시선을 놓을 수 없었다.

문과생인 나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지만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삶과 닮은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중에서도 ‘양자컴퓨터는 가능성의 세계를 탐색하며 결과는 외부의 관측에 따라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말은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우리가 인생에서 그렇게까지 정답을 찾고 싶어 했던 이유는

사실 시스템 안에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늘 완벽한 선택, 치밀한 계획, 완전한 결과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채근하고,

주위 사람들까지 조급하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조금만 어긋나도 “이건 틀렸어”라고 단정 짓기 바쁘다.

그렇게 우리는 ‘오차 없는 인생’을 추구하며 점점 지쳐간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주를 본다.

누군가는 타로를, 누군가는 점을 본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결과를 미리 아는 힘’에 끌려왔다.

MBTI, 혈액형, AI 심리 검사까지.

모든 게 예측과 분류를 통해 불확실함을 줄여보려는 시도들이다.


물론 위로가 필요할 때 그런 도구들이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도구들이 ‘당신은 이런 사람이에요’라며

삶의 가능성을 ‘결과로 고정’시킬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아주 조용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측정되기 전까지, 당신은 모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 안에 넣어진 고양이는

뚜껑이 열리기 전까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두 개의 상반된 상태가 겹쳐 있는 중첩 상태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속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비밀이 숨어 있다.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미완성인 상태가 아니라

가장 살아있는 가능성 그 자체라는 뜻이다.

어느 방향으로든 향할 수 있는 입자처럼,

여전히 ‘살아 있고 동시에 죽어 있는’ 가능성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시선으로,

어떤 타이밍에,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현실은 그제야 결정된다.


즉, 확률을 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나’라는 관측자였다.

나는 이 강연을 통해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확실한 것’을 애타게 찾았는지.

그리고 왜 자꾸만 더 불안해졌는지.

사실 인생은 처음부터

확실하지 않도록 설계된 세계였다.


우리는 그 안에서 수없이 부딪히고,

수없이 실패하고, 때로는 방향도 잃는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측한 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며 변화시키는 존재다.


그 선택이 매번 정확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자신만의 우주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된다는 건

굉장히 멋지고 의미 있는 일이다.


나는 아직 상자 속에 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나를 관찰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정해지지 않았다는 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생각이

오늘의 나를,

그리고 내일의 나를

조금은 더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성공엔 긴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영상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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