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를 꿈꾸던 조각들

프레임 리터러시 : 스물 아홉번째 이야기

유토피아를 꿈꿔 온 인류는 변화를 시도하지만 그 세계가 멀게만 느껴지는 상실감이 작품이 된다면


지난 9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디자인 마이애미 ‘인 시추(In Situ)’ 아시아 첫 전시 기자간담회를 준비했었다

같은 날, 오전 시간에 리움미술관에서도 이불의 전시 기자간담회가 예정돼 있었다.

기자들은 반으로 나뉘었고, 일정은 빠듯해졌다. 결국 우리는 간담회를 예정보다 일찍 시작해, 한 시간 만에 마무리한 뒤 기자들이 곧바로 리움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동선을 조정했다.


그날의 선택은 계산이 아니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기자들이 이불의 전시에 쏠릴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불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전시를 넘어, 동시대 한국 미술이 가진 세계적 위치와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3개월이 지나서야, 나는 관객의 자리로 리움미술관에 들어섰다.

기획자도, 홍보 담당자도 아닌 한 명의 관람자로서.

그리고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왜 그날 기자들이 나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불의 전시는 시선보다 먼저 동선이 정해지고, 감상보다 먼저 위치가 결정된다.

어느새 나는 전시를 보고 있는 관객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관객이 걸음을 재고, 방향을 바꾸고, 때로는 스스로가 구조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해 그녀의 작품 앞에서는 관람이 아니라 체류가 일어났다.

리움에서 마주한 이불의 작업들은 인간에서 구조로, 신체에서 문명으로 이동했다. 사이보그, 포스트휴먼, 유토피아적 건축, 미래 도시의 잔해처럼 보이는 조형물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감각을 품고 있다. 완전해 보이지만, 언제든 붕괴될 것 같은 구조. 이불은 늘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던 근대적 상상력이 어떻게 권력과 통제로 변질되었는지를 시각화해왔다.

그의 대형 설치 작품 앞에서 관객은 자유롭지 않다. 거울과 반사, 미로 같은 구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수없이 확인하면서도, 동시에 길을 잃는다. 마치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이불의 작업은 말없이 묻는다. 우리는 이 구조를 만든 주체인가, 아니면 그 안에 갇힌 존재인가.


이번 전시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코로나 이후 제작된 평면 작업들이었다. 과거 이불의 작업이 ‘들어가야 하는 구조’였다면, 최근의 평면은 들어갈 수 없게 된 구조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입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입체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시대가 평면 위에 눌러앉은 듯했다.


거리두기 이후, 우리는 몸의 이동과 접촉이 제한된 세계를 경험했다. 공간은 통제되었고, 구조는 더 선명해졌다. 이불의 평면 작업 속에 등장하는 분절된 형상과 파편화된 이미지들은, 여전히 건축적이고 구조적이지만, 이전처럼 관객을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대신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사유를 요구한다. 구조는 이제 물리적 체험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흥미로운 점은, 형식이 달라졌음에도 이불의 질문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평면 속에서도 여전히 신체는 불완전하고, 유토피아는 미완이며, 문명은 균열을 품고 있다. 오히려 입체의 압도감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 질문은 더 조용하고 집요하게 다가온다.

이불은 미래를 상상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한때 믿었던 미래가 왜 늘 실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작가에 가깝다. 그의 작업은 희망을 제시하기보다, 실패의 구조를 해부한다.


이불의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하나의 철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작업에는 늘 여러 사상이 겹쳐진 채 공존한다. 몸을 통제하는 구조를 마주할 때는 푸코의 권력이 떠오르고, 무너진 도시와 미완의 건축 앞에서는 벤야민이 말한 ‘진보의 잔해’가 겹쳐진다. 사이보그와 인공 신체에서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가,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진 형상들에서는 포스트휴먼 철학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호출된다.


그러나 이불의 작업이 철학적이면서도 특정 사상에 갇히지 않는 이유는, 그가 개념을 설명하기보다 체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전시는 이론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사상이 몸을 통과하는 장소에 가깝다. 관객은 어느 순간 ‘이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기보다, ‘왜 나는 이 안에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먼저 느끼게 된다. 이불은 철학을 해석의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살아 있는 질문의 상태로 전시장에 배치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하나의 메시지가 또 다른 메시지를 밀어내지 않는다. 권력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로, 기술은 다시 인간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유토피아의 실패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구조의 현재형이다.


리움에서 전시장을 나오며 나는 생각했다. 이불의 작업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이미 수많은 구조 속에서 살고 있고, 그 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법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이불은 그 익숙함에 균열을 내는 작가다.


그리고 그 균열 앞에서, 관객은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인류는 바라는 세상을 과연 완성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