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밀기에서 목캉스까지, 나의 목욕 연대기
어린 시절 주말이면 엄마 동생과 함께 목욕탕에 갔다. 씻는 일은 좋지만 힘들기도 했다.
때밀기에 진심인 엄마가 때를 밀면 살이 벌겋기도 했고, 서로 등을 밀어주는 것은 힘든 노동이었다.
엄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연년생 남매를 모두 씻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의 육체적 움직임 끝에 찾아오는 개운함과 고소한 흰 우유, 딸기우유, 초콜릿우유를 빨대로 들이키는 시원함은 어른이 되어 퇴근 후 삼키는 맥주 한잔 못지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혼자서도 잘 갔었다.
엄마에게 배운 대로 때를 밀다가 타월이 말리지 않도록 검은색 줄이 그려진 녹색 이태리타월에 수건을 접어 넣고, 판판하게 한 후 물려받은 때밀기 완벽주의에 한창 커가던 때라 힘도 더해져 엄마가 밀어주던 것보다 더한 상처를 낼 정도로 깔끔이상을 추구하기도 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엄마에게 배운 대로 옆자리 낯선 아주머니께 서로 등을 밀자는 제안도 먼저 하고, 잘 민다는 칭찬도 자주 들었다.
사춘기가 되자 또래 친구들은 대중목욕탕을 기피했다. 나는 목욕탕 가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인생 최고의 몸무게 기록을 가진 시절, 친구들이 알아서 대중목욕탕을 안 오니 오히려 아는 사람 마주칠 일이 없어져 당당히 목욕탕을 다녔다.
나의 목욕탕 예찬에 고등학교 때 베프는 용감하게 함께 가는 결정을 내려 대학시절까지 가끔 함께 다녔다.
목욕탕 이용법, 사우나 들어가기, 엄마에게 배운 때 미는 비법도 공유하며, 학창 시절 스트레스를 풀었다.
단지, 어린 시절 목욕 후 먹던 우유는 함흥냉면과 육수 한 주전자 걸치는 루틴으로 바뀌었다. 함께 땀 흘려 일한 뒤 마시는 새참 막걸리 못지않게 뿌듯했다.
"여친나서목, 남목나서친", 오래전 TV토크쇼에서 들은 줄임말이다. "여자는 친해지고 나서 함께 목욕탕에 가고, 남자는 목욕을 함께 하고 나서 친해진다"는 의미였는데... 친해지고 나서 목욕도 가고, 지금도 자주보지 못하지만 여전한 베프인 것은 목욕의 추억 덕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인이 되고, 때를 자주 미는 것이 피부에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피부 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나이가 되면서 목욕탕 가는 횟수는 줄었다.
명절 연휴를 활용하되 때밀기는 전문성 있는 세신 여사님들께 외주화 했다. 아로마 오일과 오이 마사지라도 붙이려면 돈은 좀 들지만, 먹고사는 일에 최선을 다한 내게 주는 작은 명절 선물 "목캉스"라 여긴다.
하루하루 직장 노동을 버티기 위해서는 씻는 것도 체력이 필요하다. 나를 일으키기 위한 목욕노동에서는 자본을 투입해 해방되었지만, 직장 노동으로 형태만 달라진 셈이다.
복병은 코로나였다. 대중목욕탕을 갈 수 없어 욕조가 없던 집에 이동식 욕조를 들였다. 이건 또 신세계! 뜨거운 탕목욕은 목욕탕 가야만 가능했었는데 샤워만 하던 집에서 수시로 몸을 담글 수 있으니 너무 좋더라.
야근을 많이 했거나, 피곤이 쌓였을 때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빨리 풀려 조금은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경험이 더해져 다양한 입욕제와 버블바, 오일을 사용해 보니 색깔 보는 즐거움, 향을 느끼는 즐거움, 피부의 촉촉함도 기분을 풀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한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얼음물이나 따뜻한 차를 한잔씩 들이키는 것은 오감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조합이다.
목욕은 단순한 씻음과 친목의 시기를 넘어 몸과 마음을 재생하는 소중한 휴식 시간이 되었다.
때밀기를 배우던 어린 시절을 지나, 친구와 함께하던 목욕탕 시절을 넘어, 이제는 오롯이 나를 위한 목욕을 즐기는 시기.
'목캉스'라는 말처럼, 목욕은 더 이상 위생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 힐링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만족감의 근원은 "선택의 자유"이다.
내가 목욕을 하고 싶은 날, 내가 원하는 온도의 물, 내가 고른 입욕제, 내가 선택한 음료, 내가 좋아하는 음악. 이 모든 것이 모여, 나만의 충만한 시간이 된다.
이렇게 나를 돌보는 순간, 몸도 마음도 녹아내린다.
이런 시간을, 당신도 한 번 누려보고 싶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