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7 월) 서유럽 렌터카 여행(55)
어제 3만 보 가까이 걸었더니 얼마나 피곤했던지 저녁에 여행기를 쓰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잠을 깨니 오전 8시 가까이 되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다. 곧 비가 올 기세이다. 그렇지만 별 걱정은 안 된다. 이 며칠 동안 오전에는 항상 흐리다가 오후만 되면 햇빛이 나왔다.
내일 파리를 떠나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내일 오전에 가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한다는 것이 자꾸 미뤄졌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오늘 티켓은 이미 매진이고 내일 티켓은 오후 4시 이후만 남았다. 내일 오전에 파리를 떠나야 하는데, 아쉽지만 베르사이유 궁전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20년 전에 베르사이유 궁안에서 거의 5시간 동안을 구경하며 돌아다닌 적이 있기 때문에 크게 아쉬움은 없다.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11시가 다 되어서야 숙소를 나섰다. 처음 갈 곳은 뤽상부르 궁전(Le Palais du Luxembourg)과 공원이다. RER을 타고 노트르담 역에서 내렸다. 역 밖으로 올라오니 센 강 저쪽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인다. 센 강 가운데 세인트셔터 섬이 보이는데, 아주 웅장해 보이는 건물이 서있다. "빨래 더 쥐스티스"로 이곳에는 프랑스의 주요 사법기관이 대부분 입주해 있다고 한다. 이 건물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사법건물로서, 중세 시대에는 왕국으로 사용되다가 13세기부터 사법권이 이쪽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뤽상부르 공원으로 가는 길에 조그만 광장이 있고 그 앞에 예쁜 건물이 있는데, 오데온 극장이라고 한다. 프랑스에는 6개의 국립극장이 있는데, 오데온 극장은 그 가운데 하나라 한다. 파리에는 외국 지명 혹은 외국인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것이 많은 것 같다. 지하철 역으로 롬므(Rome), 벤자민 프랭클린 광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 케네디 역도 보았다. 그래서 뤽상부르(Ruxemburg) 궁전도 룩셈부르크와 스펠링까지 똑같으니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했으나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한다. 옛날 이 지역을 다스렸던 귀족 집안의 이름이라 한다.
뤽상부르 궁전은 17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지금은 프랑스 상원의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ㄷ"자 모습으로 생긴 궁전인데, 아주 크고 아름답다. 궁전 앞쪽은 넓은 정원으로서, 현재는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원은 궁전에서 곧장 앞쪽으로 뻗어있는데, 그 길이는 거의 1킬로 가까이 될 것 같다.
궁전 뒤쪽을 통해서 궁전과 공원으로 간다. 그 옆쪽으로도 작은 공원이 마련되어 있는데, 나이를 알기 어려운 아름들이 큰 나무들이 서있다. 그 옆에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고 그 끝에는 작은 분수가 있는데, 퐁텐느 메디씨스, 즉 메디치 분수라 한단다. ‘메디치’라면 이탈리아 피렌체를 통치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의 명문 가문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 메디치 분수가 있을까? 바로 이전에 소개한 바 있는 메디치 가문의 딸로서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e' Medici)가 이 궁전을 세웠기 때문이다. 정원을 다 둘러보고 싶었지만, 너무 넓어 엄두가 안 난다.
다음은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까운 역에 도착하여 지상으로 올라갔더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심한 비는 아니지만, 맞고 다니기에는 부담스럽다. 레스토랑에라도 들어갈까 했으나 곧 비가 멈춘다. 완만한 경사길이 계속되다가 좁은 데다 아주 경사가 급한 계단길이 나온다. 계단을 다 오르니 갑자기 큰 탑이 나오더니 둥근 성당의 지붕이 나온다.
바로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종탑이다. 이 성당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완공되었으니 역사가 별로 오래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에 완성된 건물인 만큼 무척 아름답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오면 파리 시내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성당 앞에는 광장이 있고, 광장에는 레스토랑을 비롯한 상업시설과 함께 화가들이 그림을 그려 팔고 있다. 지금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우리가 상상하듯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지향하는 꿈나무들이 아니라 대부분은 그림을 그려 먹고사는 생계형 화가들인 것 같다.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올라오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 차도 한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골목길이다.
몇 달 전에 <파리의 미국인>이러는 고전영화를 감상하였다. 2차 대전 중 유럽에서 근무하던 미군 병사가 전쟁 후 파리에 남아 화가를 지향하며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참된 사랑을 만난다는 내용의 뮤지컬 영화였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그 언덕의 골목길에서 그림을 전시하여 팔고 있었는데, 바로 그 골목길도 보았다. 영화 속에서 보았던 장소를 이렇게 직접 와서 실제로 보는 것도 큰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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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파리시가 내려다 보인다. 그러나 노트르담 등의 문화재가 있는 쪽은 아닌 것 같다. 높고 큰 빌딩은 하나도 없이 낮은 집들만이 끝없이 펼쳐지는 인상적인 도시이다. 조금 전까지 비가 내리던 날씨는 어느덧 개고 햇빛이 비친다.
다음은 샹젤리제 거리이다. 고급 레스토랑과 명품숍들이 즐비한 거리이다. 샹젤리제 거리라면 프랑스의 화려함을 대표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나는 샹젤리제라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카스바의 여인”(カスバ の女)이라는 일본 노래이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로서,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카스바에 자리한 어느 술집에서 만난 프랑스 외인부대 병사와 술집 여가수의 애달픈 하룻밤의 사랑을 그린 노래이다. 그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느의 황혼은 꿈속의 수도, 꽃이라면 마로니에 샹젤리제”, “당신이나 저나 모두 팔려진 목숨, 사랑을 해 본들 하룻밤의 불장난”. 우리나라에도 “카스바의 여인”이라는 노래가 있지만, 이 노래의 지리적 배경은 어딘지 모르겠다. 카스바란 회교도들의 옛 성곽을 말하는데, 특히 알제리에는 카스바란 이름이 붙은 구시가지가 있다.
샹젤리제 거리는 개선문에서 뻗어나간 12개의 도로 가운데 메인 도로이다. 어제 이곳에 왔으나 제대로 구경을 하지는 못했다. 지하철 역을 나오니 바로 개선문 옆이다. 이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소나기로 바뀐다. 허겁지겁 가까운 가게로 피신하였다. 30분쯤 지나니 비가 잦기 시작한다. 가랑비를 맞으며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대부분이 명품숍이라 그런지 거리가 크게 붐비지는 않는다.
좀 걷다 보니 특이한 빌딩이 보인다. 길이가 근 100미터 가까이 되는 큰 빌딩인데, 창문 하나 출입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은빛 건물 표면에는 루이뷔통 상표 무늬만 그려져 있다. 루이뷔통 본사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옆에는 루이뷔통 매장이 있는데, 거의 3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장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다음에 갈 곳은 콩코드 광장과 튀일리 공원인데 이런 날씨에 도저히 갈 상황이 아니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오늘은 이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열차에서 내려서 호텔을 향해 걷고 있자니 어느새 햇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참 못 말리는 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