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후 3시가 넘어 배가 고프다. 집사람이 막국수로 점심을 먹자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30년 전통의 막국수집이라는 큰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가니 도로 옆 야트막한 언덕 위에 큰 막국수집이 있다. 식당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지만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거의 없다. 막국수를 주문하였다. 얼마 뒤에 막국수가 나왔는데, 면이 찰지지 못하다. 메밀은 원래찰지지를 못하기 때문에 메밀만으로는 국수를 만들기 어렵다. 그래서 보통 밀가루와 메밀을 섞어 메밀국수를 만드는데, 이 집은 국수가 그리 찰지지 않은 것을 보니 밀가루보다 메밀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먹어보니 꽤 맛있었다.
메밀국수에 얽힌 기억이 하나 있다. 10년쯤 전 어느 유통 관련 단체가 주관한 일본 유통업 실태 시찰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단체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우리나라 대형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간부사원들이었다. 일본에서 통역 겸 안내를 담당한 사람은 일본의 어느 대학 경영학 교수로서, 일본에 유학하여 경영학 박사를 받은 후 그곳에서 눌러앉아 교수 생활을 하는 분이었다. 점심시간에 시찰단이 모두 어느 메밀국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이 안내역을 맡은 교수에게 “소바”를 뜻하는 한자가 있느냐고 질문하였다. 잘 아시다시피 “소바”란 일본어로 “메밀”을 뜻하는 말이다. 그 교수는 소바는 순수한 일본어로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다고 하였다.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아니다 소바를 뜻하는 한자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리고 “메밀 교(蕎)” 자를 써 내보이며 이것을 “소바”라고 읽는다고 하였다. 이렇게 옥신각신 이야기가 나와 내기가 벌어졌는데, 내가 이겼다.
8. 송지호와 천학정
점심을 먹고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가 길 오른쪽에 송지호란 넓은 호수가 나온다. 송지호란 이름의 배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곳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송지호 해수욕장이 나온다. 송지호는 바닷가에 인접한 특이한 호수이다. 바다에 가까운 탓인지 짠물이 섞여 있어 겨울에도 잘 얼지 않고, 바다 물고기와 민물 물고기가 섞여 살고 있다고 한다. 겨울에는 청둥오리, 기러기와 백조 등 철새들도 많이 들린다고 한다. 둘레가 약 6킬로이며, 넓이가 20만 평에 이르는 꽤 큰 호수이다.
송지호 입구로 들어가면 관망타워가 나온다. 이곳에 올라가면 철새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코로나 탓으로 시설이 폐쇄되어 있다. 호수 둘레에는 산책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아름다운 호수이다. 호숫길을 걷고 싶었지만 화진포에서 이미 많이 걸었고, 이제 오후에 접어들어 여기서 시간을 마냥 보낼 수도 없다. 20분 정도 호수 주위를 산책하기로 하였다. 여름날이긴 하지만 날씨가 흐리고, 또 호수에는 새들도 보이지 않아 좀 쓸쓸한 느낌이 든다. 바닷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고요한 호수이다. 동해 해변의 풍경도 좋지만 이곳 송지호는 바다와는 다른 색다른 느낌을 준다. 관광객은 우리를 제외하고는 보이지 않으며, 한참 걷다 보니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주민을 한 사람 만날 수 있을 뿐이었다.
윗 그림은 송지호, 아래는 천학정과 그 앞바다
송지호를 떠나 그만 돌아갈까 생각했으나 이 근처에 “고성팔경”에 속하는 천학정과 청간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둘 모두 가기에는 그렇고 해서 천학정만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송지호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5분도 걸리지 않아 천학정에 도착한다. 주택이 있는 얕은 언덕 위에 조그만 정자가 하나 놓여 있다. 아마 최근에 지은 정자인 것 같다. “고성팔경”이라는 말을 만들어 놓고 그 8개의 명승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이 천학정이란 정자를 끼워 넣은 것 같다. 같은 고성팔경이라 하지만 이 천학정은 화진포 해변이나 송지호, 통일전망대 등과 비교해서는 도저히 같은 “급”이라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9. 거진 수산시장
이제 오늘 관광은 마쳤으니 거진 수산시장을 들러 저녁거리를 사서 휴양림으로 돌아가려 한다. 거진 수산시장 바로 옆에는 수협에서 운영하는 제법 큰 마트가 있다. 집사람이 구태어 여기서 황태를 사려고 한다. 내가 진부령 길에 있는 황태 가게에서 사자고 하였으나, 수협의 물건이 더 안심하고 살 수 있다고 하며 이곳에서 산다고 한다. 비닐 포장된 10마리짜리 황태 한 포와 찢어 포장한 황태포를 한 봉지 샀다. 집에서 종종 황태 껍질로 반찬을 해 먹기 때문에 황태 껍질을 사려고 하였으나, 이곳에선 팔지 않는다고 한다.
수산센터로 들어갔다. 어제저녁과 오늘 아침 오징어는 질리도록 먹었으므로 오징어는 이제 돌아보기도 싫다. 오늘은 가자미나 도다리 회를 먹기로 했다. 도다리도 가자미 종류에 속하는 생선이다. 광어와 도다리는 구분이 잘 가지 않는데, 보통 “좌광우도”라 하여 눈이 왼쪽을 보고 있으면 광어이고 오른쪽을 보고 있으면 도다리이다. 광어와 도다리는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생선이다. 도다리는 “문치가자미”라고도 하며 가자미과 고기인데 비해 광어는 가자미목에 속하지만 넙치과에 해당한다. 같은 목이지만 종이 다르다는 것은 사람과 원숭이만큼의 차이다. 사람은 “원숭이목 사람과”에 속한다.
거진수산시장
도다리는 1킬로에 3만 원이라 한다. 아주 얄팍해 보이는 작은 도다리가 먹음직스럽니다. 1킬로로 제대로 먹을 수 있으려나 생각하면서 1킬로를 달라고 하니 4마리를 준다. 회 뜨는 곳에서 5천 원을 주고 회를 떴다. 2마리는 세꼬시로 하고 좀 큰 것 2마리는 뼈를 제거한 회로 하라고 한다. 이제는 회 뜨는 것도 상당 부분 기계를 이용한다. 머리를 치고 내장을 꺼낸 후 기계에 넣으니 껍질이 제거된다. 그리고 세꼬시 용은 손질한 고기를 기계에 넣으니 마치 국수기계처럼 불과 2-3초 만에 세꼬시 회가 되어 나온다. 그리고 뼈를 제거한 것은 회 뜨는 아줌마가 직접 회로 썰어준다. 양이 얼마 안 될 걸로 생각했는데 양이 엄청나다. 대전에서 고등학교 동창 모임 때 가끔 이용하는 횟집이 있는데, 그곳이 가면 아마 30만 원도 훨씬 넘을 정도의 양이다.
10. 진부형 황태 가게를 들러 휴양림으로
진부령 정상을 넘어서자마자 바로 황태 가게가 보인다. 집사람이 황태 껍질을 사겠다고 하여 이곳에 들렀다. 중년의 아줌마가 가게를 보고 있는데, 이 가게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황태 덕장에서 말린 황태만을 취급한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가게 뒤편으로 황태 덕장이 보인다. 집사람이 상품을 훑어보더니 아주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거진 수협마트에서 황태를 사버려 이곳에서 다시 살 수는 없다. 황태 껍질 한 포와 찢은 황태 한 포를 샀다. 다음부터는 황태를 여기서 주문해 먹을 요량으로 명함을 받아 나왔다.
휴양림으로 들어와 산길로 운전해 올라가니, 중간에 드문드문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휴양림 입구에서부터 우리가 숙박하는 연합동까지는 따로 산책로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이 차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숙소를 나와 바로 숲 속 산책길로 연결되는 우리 숙소는 위치가 아주 좋은 것 같다.
진부령 고갯길
휴양림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먼저 수산시장에서 사 온 도다리 회부터 풀었다. 회를 뜰 때도 그랬지만, 풀어놓고 보니 회 양이 정말 엄청나다. 큰 접시 두 개에 수북이 담기는 양이다. 집에서 가끔 대전농수산물 도매시장에 가서 광어회를 떠 오는데, 광어회는 1킬로라 해봤자 정말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도다리는 양이 정말 많다. 물건을 파는 아줌마들이 양을 넉넉하게 준 것인지, 아니면 세꼬시라 특별히 효율이 좋은 건지 어느 쪽인지 알 수는 없다. 아마 양쪽 다이겠지. 더 이상 못 먹을 정도로 배불리 먹었는데도 여전히 반 정도가 남았다.
11. 휴양림에서의 한가한 저녁시간
젊었을 때는 여행을 가면 저녁에는 주로 술집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면 저녁엔 정말 시간이 없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술집을 다니는 것도 싫어지고 해서 계속 숙소에 있게 되는데, 그러 다보 면 시간이 많이 남아돈다. 이것을 기회로 여행을 가면 저녁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숙소에서 기행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기행문이라는 것이 쓰다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보통 기행문 하나가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15-25페이지 정도 되는데, 이것을 모두 핸드폰으로 쓰려면 빨라야 2시간, 많이 걸릴 때는 3-4시간이 소요된다. 이러다 보니 기행문을 쓰면 저녁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된다. 이 일도 부담이 되어 지난번 여행부터는 여행지에서는 기행문을 쓰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서 쓰면 30분 남짓이면 될 일을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기행문을 쓰지 않으니까 저녁시간이 너무 많다. 아주 여유 있게 보낼 수 있다. 가져온 의자를 베란다에 내놓고 앉으니 시원한 숲 공기와 바람, 그리고 계곡 물소리가 너무 좋다. 이렇게 좋을 걸 괜히 기행문을 쓴다고 끙끙거렸다. 오늘 저녁부터 시작하여 내일 오전까지 제법 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다. 내일 돌아가는 길에 곰배령에 가려고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