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는 서울의 카페들 - 10
홍익대학교 건물 바로 건너편, 복작거리는 길 틈새에 좁은 벽돌 계단이 있었다. 그곳으로 올라가면 차나 오토바이가 다니지 못해서 훨씬 한산한 골목이 나왔다. 계단이 끝나고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 마당 있는 집을 개조한 찻집 오리페코가 있었다. 사장님의 별명이 오리여서 오리를 마스코트로 삼았다고 알고 있다. 대문 위의 큼지막하면서도 귀여운, 찻잔에서 헤엄치는 오리 모형이 멀리서도 눈길을 끌었다.
가정집의 분위기가 남아 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잘 가꾸어진 정원에 놓인 세 개의 테이블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앉을 수 있는 나무 그네도 있었다. 건물의 한 면 전체가 접이식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서 실내 자리에서도 정원이 잘 보였다. 마당이나 야외 테이블이 있는 카페 자체는 홍대 주변에서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당이 충분히 넓으면서도 담장으로 외부와 분리되어 있고, 그곳에 놓인 야외 테이블에서 초록빛에 둘러싸여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는 내가 알기로는 오리페코밖에 없었다. 번잡한 홍대 앞에 숨은 비밀의 화원과도 같은 장소였다.
내부도 동화 같은 느낌으로 꾸며 놓았다. 파스텔톤의 벽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인형과 소품이 놓여 있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도 무민 시리즈 등의 그림책이 많았다. 책장은 오리페코에서 가장 신기하고 특징 있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마치 미닫이문처럼 책장을 옆으로 밀면 일종의 비밀 통로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저 화장실로 이어지는 아주 작은 공간일 뿐이었지만 처음 온 손님들은 누구나 감탄하고 재미있어 하는 부분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화장실이 가게의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가리기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장실 입구마저 동화적인 분위기의 일부로 만든 것이다.
오리페코는 다양한 홍차를 갖춰 놓은 티룸이었다. 홍차 관련 책까지 출간한 적이 있는 사장님의 홍차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2008년쯤 개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절에 홍차 전문점을 여는 일은 지금보다도 더 큰 모험이었을 것 같다. 스리랑카 브랜드 딜마, 프랑스 브랜드 마리아쥬 프레르, 일본 브랜드 루피시아의 제품이 가장 많았다. 티웨어에도 신경을 써서 노리다케를 비롯해 여러 브랜드의 예쁜 찻잔과 티팟을 사용했다. 커피와 허브차 등 다른 음료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시원한 우유에 커피로 만든 얼음 큐브를 넣은 아이스 큐브라떼가 기억에 남는다.
디저트도 다양한 편이었고 대부분 가게에서 직접 만들었다. 홍차 전문점에 없으면 섭섭한 스콘, 진득한 초콜릿이 들어 있는 퐁당쇼콜라, 식사 대신 먹어도 충분한 그릴샌드위치는 모두 주문을 받자마자 구워내서 뜨끈뜨끈했다. 오픈키친이었기 때문에 특히 대표 디저트인 퐁당쇼콜라를 구울 때는 가게 안팎의 예쁜 풍경에 어울리는 달콤한 향이 실내에 가득 찼다. 물론 쿠키나 우유 푸딩처럼 차에 가볍게 곁들일 수 있는 티푸드도 있었다. 여름에는 빙수도 인기가 있었다.
오리페코는 서울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겨울에 을씨년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이 가게의 유일한 단점이기도 했다. 담장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을 포함해서 정원의 절반 이상이 시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철이 찾아오면 그만큼 더 빛나는 가게이기도 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정원으로 통하는 출입문과 접이식 유리문이 활짝 열렸고, 그 덕분에 실내 자리에서도 정원의 싱그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매년 가을마다 ‘더 쌀쌀해지기 전에 오리페코 야외 자리에 앉아야지.’ 라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다. 아직 초록색을 잃지 않은 정원에서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을 즐기며 이어폰으로 음악도 듣고, 실내의 책꽂이에서 꺼내 온 그림책을 읽기도 했다. 그네에 잠시 앉으면 바로 옆에는 빨갛게 익은 꽈리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오리페코는 2017년쯤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다른 카페가 생겼다. 카페에 잘 어울리는 건물이기 때문에 최소한 같은 업종의 가게가 들어와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사진을 찾아보니 정원과 인테리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 생긴 카페도 잘 되기를 바라고, 언젠가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내게는 오리페코와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리페코의 정원에서 향기로운 홍차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동화책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제 그 평화롭고도 환상적인 즐거움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