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중년>, <지옥의 문>
파리 오르세 미술관, 앙리 루소의 그림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앞에 서면 묘한 매혹에 사로잡힌다.
배경은 짙푸른 열대의 숲,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인 화가 마리 로랑생이 다정하게 서 있다.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마치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미지의 열대우림이 그들 뒤로 펼쳐진다.
아폴리네르는 양복을 차려입고, 로랑생은 드레스를 입었다.
배경과 옷차림이 대비되며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인 꿈속 같다.
그림의 장소는 어디일까?
앙리 루소는 평생 파리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세관원이었으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정글을 실제로 경험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파리 식물원에서 본 이국의 식물들, 여행 잡지 속 삽화, 그리고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자신만의 상상 속 밀림을 그려냈다.
그의 숲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어딘가 어설프고 기묘한 상상의 무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 비현실성 덕분에 파티라도 갈 태세로 우아하게 서 있는 연인들이 마치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 듯 신비롭게 보인다.
앙리 루소의 숲을 보고 있으면 문득, 내 어릴 적 우리 동네를 찾아왔던 이동식 사진관앞에선 사진 한장이 생각난다.
바퀴 달린 수레 위에 사진관 모형이 펼쳐지고, 뒷배경으로는 우거진 밀림 숲과 정면을 응시하는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무섭게 그려져 있다.
두세 살쯤 보이는 나는 그림 속 호랑이 앞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흑백사진 속 배경은 엉뚱하고 어설픈 그림 속 세상이지만, 활짝 웃고 있는 나의 어린날만큼은 진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앨범 속 흑백 사진은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기억인 양 종종 호출되고 있다.
루소의 밀림은 마치 그 이동식 사진관의 배경과도 같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법한 배경 속에서, 연인의 젊음은 사진처럼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
깃털 펜을 든 아폴리네르는 당대 프랑스의 중요한 시인이자 비평가였다.
곁에서 두 손가락을 들어 앞을 응시하는 마리 로랑생 또한 파리 아방가르드 예술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아폴리네르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마부에게 몇 분마다 팁을 쥐어주며 더 빨리 달리라고 재촉했을 만큼 못 말리는 사랑꾼이었다고 한다. 그림이 그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사람은 격렬한 다툼 끝에 헤어졌고, 로랑생은 독일로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아폴리네르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부상을 입은 뒤 스페인 독감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녀가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토록 간절했던 젊은 날의 사랑도 사라졌다.
젊음은 언제나 스스로를 영원이라 착각하게 만들지만, 세월은 잔혹하게도 그 착각을 무너뜨린
다.
앙리 루소가 그린 그림만이 두 사람을 환상의 숲에 영원히 젊은 연인으로 남겨놓았다.
동네 이동식 사진관 속에서 웃고 있는 흑백사진 속의 어린 나도 시간 속에 흩어져버린 한 조각의 기억처럼 남아 있다.
예술만이 그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영원한 현재로
고정시킨다.
오르세 미술관의 다른 공간에는 까미유 끌로델의 <중년>이라는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1893년부터 1900년 무렵에 제작된 청동 작품은 서늘한 통찰을 안겨준다.
무릎 꿇은 젊은 여인이 간절하고 필사적인 표정으로 한 남자에게 손을 뻗고있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고개를 돌린 채 뒤편의 노파의 단호한 손아귀에 끌려가고 있다. 허망하게 손을 뻗는 젊은 여인의 절규에 비극이 느껴진다.
이 세 인물은 세기의 조각가 로댕, 로댕의 오랜 동반자 로즈 뵈레, 그리고 천재적인 젊은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자신으로 해석된다.
까미유는 열아홉 살의 나이에 스물네 살 연상의 오귀스트 로댕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고, 연인이자 예술적 동반자가 되었다. 그녀는 로댕의 뮤즈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 또한 천부적 재능을 지닌 조각가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남성 중심 사회는 그녀를 독립적인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로댕의 결혼을 막을 수 없었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면서 까미유의 삶은 비극적인 파국을 맞이했다.
까미유의 작품 <중년>은 바로 그 비극적인 관계의 정수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넘어, 더욱 보편적인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극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젊음은 필사적으로 영원을 붙잡으려 하지만, 중년은 시간의 흐름 속에 끌려가고, 결국 노년이라는 거대한 힘이 그를 데려가는 것이다.
이 조각은 단순히 한 여성의 파란만장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어느새 맞닥뜨리게 되는 시간의 절대적인 힘, 시간의 덧없음과 그 앞에 놓인 인간의 무력감에 대한 성찰이었다.
파리 로댕 미술관의 정원에 들어서면 거대한 작품 로댕의 <지옥의 문>과 마주하게 된다.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의뢰로 시작된 이 작품은 로댕이 평생을 매달렸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눈앞을 압도하는 웅장한 청동문 전체에는 무려 200여 명의 인물이 뒤엉켜 있다.
그들은 욕망, 절망, 고통, 희망 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출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이 문은 삶과 죽음, 선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인간 존재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집약해 놓은 듯하다.
그 문턱 위에는 로댕의 대표작 <생각하는 사람>이 고독하게 앉아, 이 모든 고통스러운 군상을 응시하며 깊은 사유에 잠겨있다.
이 웅장한 청동문 앞에 선 관람객들 대부분도 숙연한 침묵에 잠긴다.
오르세에서 덧없는 젊음과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시간의 무력함을 보고 온 탓일까.
이 문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아마도 누구나 언젠가는 이 문 앞에 서게 되리라는 예감, 즉 삶의 마지막 순간과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을 직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모든 열정과 좌절이 녹아든 저 문을 언젠가 통과해야 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사유하게 된다.
로댕은 이 미완의 대작을 통해 삶의 유한함 속에서 영원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영포티’라는 신조어가 세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대들을 허세 이미지로 조롱하는 단어라고 한다.
나이를 통해 세대를 구분하고, 더 젊음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인간의 표면적 욕망이 만들어낸 말 같다.
이런 신조어들은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불안의 잔상처럼 느껴진다.
파리에서 만난 세 예술 작품, 즉 앙리 루소의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까미유 끌로델의 <중년>, 그리고 로댕의 <지옥의 문>, 이 작품들도 한결같이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젊음은 영원을 꿈꾸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흩어지고, 뜨거운 사랑은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되거나 퇴색하며, 모든 인간은 결국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간다.
세월은 이처럼 모든 것을 허무로 만들고, 모든 존재를 사라지게 한다.
우리는 시간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바로 그 허무의 심연 속에서도 예술은 굳건히 남는다는 역설적인 깨달음이 찾아온다.
루소의 환상적인 밀림, 아폴리네르의 뜨거웠던 시, 까미유의 가슴을 찢는 절규, 그리고 로댕의 영원히 미완성인 죽음으로 가는 문.
그들의 삶은 짧았거나, 고통스러웠거나, 때로는 비극적이었을지라도, 그들이 남긴 작품은 오르세와 로댕 미술관의 벽과 정원에,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살아 숨 쉬며 빛나고 있다.
그 순간 우리는 허무의 운명 속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삶의 한 조각, 혹은 영원 그 자체를 잠시나마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영포티라는 피상적인 개념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시간과 허무를 초월한 예술의 경험이다.
아폴리네르의 시가 마지막처럼 귓가에 울려 퍼진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세월은 가고 예술은 머문다.
그들이 남겨둔 작품은 흩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를 다시금 단단히 붙잡아 세운다.
세월은 잔인하게도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며, 남겨진 것들마저 허무로 물들인다.
그러나 그 허무의 물결 속에서도, 예술은 마치 등대처럼 남아 우리에게 젊은 날의 찬란한 기억을 들려주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을 속삭이며, 존재의 의미를 묻는 깊은 질문을 쉼 없이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