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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ㅐ즈애플 Aug 18. 2022

Dovetail에 대한 이해


    캐나다의 지난겨울은 영하 30도를 웃돌았다. 하지만 나는 별로 춥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우리는 둘 다 아시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본인이었던 그녀와 한국인이었던 나는, 비록 다른 환경에서 자라왔음에도 문화적 이질감이 없었다. 다른 한 가지는 요리를 사랑한다는 점이다.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며 식도락을 즐긴 나와 비슷하게 그녀도 요리를 좋아해 이탈리안 레스토랑, 디저트 카페, 베이커리 등 다양한 곳에서 일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데이트 할 때면 서로가 자신 있는 요리를 상대방에게 만들어 주곤 했다. 나는 주로 그녀가 먹어본 적 없을 법한 태국 요리나 인도네시아 요리를 엉터리로 만든 뒤 원래 이런 맛이라고 우겼다. 반면 그녀는 내가 이탈리아에서 먹어 본 요리보다 더 맛있는 본토 음식을 만들어서는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하지만 다른 점은 스무 가지도 넘었다. 은근히 꼼꼼하고 계획적인 나와 달리 그녀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이었다. 나는 창가에 올려둔 화분에 물을 주고 이따금 꽃꽂이를 즐기는 조신한 남자지만,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양말부터 벗어 돌돌 말아 빨래통에 던지는 터프한 여자였다. 한번은 그녀가 던진 양말 뭉치가 내 꽃병을 맞혀 쓰러트린 바람에 정색하며 조심 좀 하라고 쏘아붙인 적도 있다. 왈가닥이지만 다둥이 엄마를 꿈꾸었던 그녀는 종종 아빠가 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곤 했다. 나는 “너 미니미 버전이 집안 돌아다니면서 어지를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프다”며 넌지시 육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했다. 반대로 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차갑다. 우린 타고난 성격도, 미래의 계획도, 세상을 대하는 온도도 달랐다. 부딪히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그 아픔이 점점 커져갈 때쯤 이별했다.



    그 후, 공통점이 많은 사람과 만나고 싶어 그런 이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도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늘 금세 깨닫고 헤어졌다. 시간이 지나도 나와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캐나다 아부지에게 연락이 왔다. 현관 앞 데크를 새로 만들려고 하는데 도와 줄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몸을 쓰며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싶었기에 아부지 댁으로 달려갔다. 한참을 규격에 맞게 나무를 자르는데 아부지가 가까이 오더니 dovetail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셨다. “Dovetail? 그게 뭐예요?” “나무판자끼리 본드나 못 없이 잇는 방법의 하난데 이런 거야” 하면서 보여주셨다. 한 나무판자에 홈을 파고, 다른 나무판자에는 그 홈에 꼭 맞는 모서리를 만들어 함께 물리게 해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고정된 모양이 dovetail이란 말 그대로 비둘기 꼬리 같았다. 두 개의 다른 나무가 더 단단히 엉겨 고정된 모습이 신기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dovetail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아 구글링을 해보았다. 여러 종류의 사진이 보였다. 어디서 왔는지, 어떤 종류인지도 모르는 결이 다른 두 나무가 하나가 되기 위해 제 몸을 깎아가며 단단히 물려있었다. 문득, 나와 비슷할 거라 여겼던 수많은 사람과 이별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세상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란 없다. 우리는 저마다의 결이 있고 온도가 있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하려면 dovetail처럼 상대방의 모서리를 위해 내 안에 틈을 만들고 함께 채워야 한다. 그래야 단단해지고 함께 할 수 있다. 지난 이별의 이유를 떠올려보면 전부 사랑의 아픔 때문이었다. 그때는 까닭 없는 아픔이 너무 싫었지만 이제는 알았다. 사랑하는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고 그래야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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