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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ㅐ즈애플 Oct 07. 2022

눈보라 속에서 뜨는 무지개, Snowbow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창밖을 보니 눈보라가 몰아친다. 눈발이 거세지면 운전하기 힘들 거 같아 서둘러 출근 준비를 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았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운전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를 흥얼거렸다. 차창 너머로 무지개가 보인다. 비 온 뒤에만 나타나는 줄 알았던 무지개가 눈보라 속에서 떴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마 작은 눈꽃 하나하나에 빛이 굴절돼 무지개가 뜬 것이리라. 이런 원리가 생각난 이유는 어렸을 적 책에서 읽었던 내용 때문이다.


    우리 집 책꽂이는 늘 텅텅 비어 있었다. 책꽂이를 가득 채울 만큼 넉넉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책을 접하며 자랄 수 있었던 건, 넉살 좋은 엄마가 이웃집에서 책을 빌려 오신 덕이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할 때 엄마는 여러 동화책을 읽어 주셨다. 성난 엄마 곰 흉내를 내기도 하고 엉엉 우는 아기 돼지 목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말이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혼자서 다양한 책을 탐닉했다. 여러 위인의 삶을 닮은 전기에서부터 지구가 왜 둥근지 설명하는 과학 서적까지. 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 읽었던 책에서 무지개의 원리를 설명해 주며 분무기로도 무지개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비 온 뒤 공기 중에 머무는 수증기에 빛이 반사돼 무지개가 생기듯, 해를 등지고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두근거리며 읽었다. 책을 덮은 나는 온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뭐하니?” “분무기 찾아요.” “분무기? 네가 그게 왜 필요해?” “무지개 만들려구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책에서 읽은 내용을 설명하자 엄마가 빙그레 웃으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 슈퍼에 가 분무기를 사 주셨다. 집에 오자마자 분무기에 물을 넘치도록 담았다. 해를 등지고 칙칙 물을 뿌리자 예쁜 무지개가 생겼다 이내 사라졌다. 엄마의 눈도 무지개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순간은 길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로는 어두운 기억들뿐이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모시고서 엄마와 함께 옥탑방에서 살던 때. 창문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내 마음처럼 깜깜한 밤하늘. 한겨울, 소리 없이 내쉬었으나 입김으로 선명히 나타나던 한숨. 특히, 선풍기도 없이 보냈던 무더운 여름밤이 잊히지 않는다. 더위에 까무러쳐 있던 나를 깨운 건 엄마의 따귀 세례였다. 엄마는 땀으로 다 젖은 내 옷을 벗기며 말했다. “이거 마시고 정신 차려!” 엄마가 준 냉수를 마시고서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멍하니 있는데 텔레비전에 심수봉이 나왔다.


“나 심수봉 좋아하는데. 엄마 ‘사랑밖에 난 몰라’ 알어?”

“엄만 그거 잘 불러.”

“그래? 한번 불러봐봐.”

“그대 내 곁에 온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담담히 노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는 심수봉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해 겨울, 나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러 나라를 쏘다닌 끝에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지금은 방 하나 딸린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엄마 또한 방 세 개가 있는 빌라에서 지내신다. 단칸방에 살던 시절보다 더 넓어진 공감만큼 엄마와 나는 여유로워졌다. 하지만 적막함을 이기지 못해 불을 켜놓고 자는 나처럼, 텔레비전을 보다 거실에서 주무시는 엄마 역시 방 세 개만큼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까? 엄마와 나의 인생은 여전히 겨울에 머무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엄마는 알까? 눈보라 속에서도 무지개가 뜬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내자 곧 답장이 왔다.



엄마 : 한겨울에 웬 무지개?

나 : 겨울에도 무지개가 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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