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캐나다 아부지와 위스키 마시는 날이다. 캐나다 어무니가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아부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일주일 사이 장례식을 서너 번 갔던 일, 동네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사건, 손자에게서 전해 들은 연애담.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나에 대한 걱정이다. 아부지가 조심스레 물으셨다. “올해 한국 가게 되면 너희 아버지 한번은 만날 거니?” 캐나다 아부지가 친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직접적으로 묻는 건 오랜만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가 아빠 이야기를 꺼린다는 걸 잘 안다.
내 어린 기억 속의 아빠는 그림을 잘 그렸다. 고모가 말하길, 아빠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음에도 사생 대회를 휩쓸었다고 한다. 다만 새엄마를 만나 재능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며 아쉬워하셨다. 아빠의 친엄마는 아빠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친할머니가 폐병으로 돌아가셨으니 나도 폐가 안 좋을 수 있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담배는 피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엄마의 바람대로 나는 담배를 안 피운다. 하지만 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담배 없이는 못 산다고 한다.
아빠는 술도 좋아하셨다. 아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술 마시는 것 말고도 더 재밌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셨던 듯싶다. 만취해서 집에 들어온 날에는 가족 모두를 깨우고선 했던 얘기를 하고, 하고, 또 하고, 다시 하기를 그칠 줄 모르셨다. 그러다 누군가 말문을 막으려 들면 손에 잡힌 무언가를 던지셨다. 그때 내 마음도 내동댕이쳐졌나 싶다.
새엄마 밑에 자란 아빠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서른 살에 엄마와 중매로 결혼했다. 엄마는 자기 좋다고 따라다니던 은행원과 결혼할 걸 그랬다며 뒤늦은 후회를 하곤 한다. 어째서 은행원을 택하지 않았느냐 물어보자 엄마가 쓴웃음을 지었다. “니 외할머니가 아빠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어.” 외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시다 얼마 전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참 멀쩡하게 생겼다. 할머니들이 좋아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다. 아빠를 닮은 나도 아줌마들에게 인기가 많다. 엄마의 운명을 답습하는지 나를 좋아한다던 은행원과 잠시 사귀기도 했었다. “걔한테 니 아빠가 버스 운전하는 거 절대 말하지 마!” 엄마가 엄포를 놓을 때면 “그럼 교수라고 해?” 하며 짜증을 내곤 했다. 언젠가 한번은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자기 부모님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말이다. 애초에 결혼할 생각도 없었지만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도 혼자다.
엄마는 이혼한 아빠를 웬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엄마와 마찬가지다. 아빠는 배다른 형제를 만들지도 않았고 우릴 굶긴 적도 없다. 도박도 하지 않았고 칼을 들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린 일도 없다. 살면서 좆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덕인지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밉기만 하던 아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이다지도 어렴풋한 속, 선명한 장면들이 몇 개는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친할머니의 제삿날이다. 아빠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엄마 사진을 지갑 속에 항상 지니고 다니셨다. 그리고 정확하지도 않은 기일을 어림잡아 제사를 꼬박꼬박 지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아빠는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으셨다. 그럴 때면 엄마는 나더러 화장실에 들어가 아빠를 안아 드리라고 했다. 너무 미워해서 지워버린 아빠이건만 그때 내가 안아 주던 아빠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이 벌게지는 나를 보며 캐나다 아부지가 괜스레 헛기침을 하셨다. “대답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돼.” 술기운이 올라서일까. 아빠를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일렁였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고개 숙여 인사를 해야 할까 악수를 청해야 할까?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물어볼 자격이 내게 있을까?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끝에 대답했다. “일단 엄마부터 만나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