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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ㅐ즈애플 Oct 09. 2022

이혼한 부부라도 연금은 반띵


    모든 게 낯설다. 따스한 공기, 버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사람들의 세련된 옷차림. 무례한 걸 알면서도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오래간만에 온 한국이 오히려 외국처럼 느껴진다. 그동안은 너무 바빠 한국에 올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영주권을 따자마자 바로 대학교에 입학해 회사 생활과 병행했기 때문이다. 매 학기 많은 과목을 수강할 수 없어 계절학기까지 들으며 공부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풀타임 학생인 동시에 풀타임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드디어 졸업을 하고 고향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인터넷으로 본 한국은 헬조선이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천국과 다름없다. 마트에 진열된 다양한 밀키트, 밑반찬과 밥이 포함된 구천 원짜리 순댓국, 그걸로도 모자라 편의점 맥주가 네 캔에 만 원이라니.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불평불만쟁이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부터가 한국이 답답해 뛰쳐나왔던 게 아닌가. 이곳에 뿌리내린 채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사람들에게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쓸데없는 생각일랑 말고 잘 먹고 푹 쉬다 캐나다로 돌아가야겠다. 

    

    그동안 쓸쓸한 명절을 보냈을 엄마가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일부러 추석에 맞춰 한국에 왔다. 살며시 집으로 들어가 “엄마, 나 왔어” 하며 뒤에서 와락 껴안으니 “아이구야!” 하고 좋아하신다. 식탁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아유, 왜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 나 이거 다 못 먹어!” “걱정 마. 너네 아빠 불렀어.” 만나야지 만나야지 말만 하고 자꾸만 미루는 내가 답답했는지 엄마가 약속을 잡았나 보다. 


    엄마는 이혼한 뒤로도 지금껏 아빠를 만나왔다. 자식을 낳고 함께한 긴 세월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나한테 부담이 될 테니 당신이 돌봐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한 번 아빠 집에 가서 반찬도 만드신다. 하지만 나는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빠를 피하기만 했다. 그런 아빠가 이리로 오고 있다니.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물만 마셨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웬 구부정한 남자가 주춤거리며 걸어왔다. 주름진 얼굴, 숱 없는 흰머리, 볼품없이 야윈 몸. 나의 기억 속 모습과는 달리 할아버지가 되어 있는 아빠였다. 하기야 아빠만 변한 건 아니다. 아빠만이 나쁜 사람이라 믿던 어린 시절의 나와, 별의별 악마 같은 사람을 다 겪어본 지금의 나 역시 다른 사람이 된 건 마찬가지다. 이런 나를 낯설어하는 아빠를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예요, 재하.” 아빠가 물끄러미 나를 보시더니 손을 내미셨다. “악수나 한번 하자.” 


    입술이 말려 발음이 새는 아빠의 목소리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빠도 연약한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혼자서 미워하다 잊다 그리워한 아빠를 마주하기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나에게 아빠가 물으셨다. “지금은 어디 사니?” 나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아빠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울컥하는 마음을 겨우 참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다양한 이름으로 세계를 돌아다닌 이야기, 캐나다에 정착한 순간, 그곳에서 만든 나의 또 다른 가족들.


    “식기 전에 밥부터 먹자.” 엄마가 모두를 식탁에 앉혔다. 긴장이 누그러졌는지 아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하셨다. “아니, 이혼을 해도 가족이라고 니 엄마가 내 연금까지 뜯어간다니까?”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자 아빠가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오백만 원을 더 넣으면 월에 이십만 원을 더 준다고 하길래 그렇게 했더니 겨우 오만 원만 더 주는 거야. 그래서 전화해 따졌더니 아니 글쎄 그 돈이 니네 엄마한테 간다네?” 엄마가 통쾌한 듯 웃으며 말한다. “아, 그거? 동사무소 직원이 알려줬는데 이혼했어도 남편 연금 일부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지, 뭐.” 어이가 없어 다 같이 깔깔 웃었다. 한국은 이혼하더라도 서로 먹고살 수 있게 연금까지 나누는 나라인가 보다. 부부끼리도 이러한데 하물며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은 오죽할까. 나에게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다. 우리는 결국 헤어질 수 없는 가족이다.


    아빠가 대뜸 “넌 결혼은 안 하니?” 하고 물으셨다. “해야지. 할 거예요.” “하면 어디서 하니?” 솔직히 캐나다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양가 상견례, 결혼식장 선정 문제, 하객은 몇 명을 부를 것이며 답례는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국에서 결혼할 경우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피하고만 싶었다. 거기다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처가댁에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지금, 더는 회피하려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혼한 전 부인이 연금을 뜯어가도 웃어넘기는 아빠와 같이, 고생만 안겨준 전 남편에게 반찬을 만들어주는 엄마처럼, 나 또한 나의 선천적 가족을 위해 작은 것 하나부터 노력하고 싶다. 아빠의 주름진 눈을 보며 쑥스럽게 말했다. “한국에서 한 번, 캐나다에서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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