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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Oct 24. 2021

럭셔리한 럭셔리 (2)

사치의 역사

럭셔리 패션은 이제 더 이상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TV에는 익숙한 유명 배우가 권하는 온라인 명품 커머스 광고가 연이어 나오고, 아이돌의 럭셔리 패션 스타일을 추종하는 어린 세대들은 고급 브랜드에 위화감을 갖지 않는다. 시대가 변해 럭셔리 패션은 이제 우리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럭셔리'라는 용어는 아름답고 질 좋은 '명품'과 분에 넘치는 '고가품'이라는 의미가 뒤엉켜, 여전히 우리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한다. 럭셔리 상품은 오랜 전통과 브랜드 철학, 장인정신이 빚어내는 최상의 상품임에는 분명하지만, 남보다 좋은 것을 소유하고 과시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민낯 그대로, 럭셔리 패션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럭셔리, 너그러운 정신

어느 시대건, 어느 곳에서나 필요 이상의 성능과 아름다운 것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것을 드러내 보이며 우월감을 표현했다. 그러나 사치(luxury), 즉 럭셔리의 역사를 따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보다 즐기고 소비하는 문화가 먼저 나타난다.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와 엘리에트 루(Elyette Roux)는 ⟪사치의 문화(Le Luxe eternel)⟫에서 사치의 원시적 형태는 '너그러운 정신'으로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시시대에도 실용성을 떠나 귀중하게 여기는 재화들이 있었고, 이 재화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어 끊임없이 재분배되었다. 독특한 점은 이때의 사치는 상업 활동이 아닌 관대함과 너그러움 속에 일어나는 소비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회적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선물하고, 향연을 베풀어 본인들의 지위를 보전하고 명망을 높이는 포틀래치(potlatch)* 같은 것이다. 지도자들은 경쟁적으로 너그러움과 관대함을 드러내기 위해, 엄청난 가치의 물건들을 태우고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모든 문명사에서의 변화는 그 사회가 보유한 잉여를 어떻게 소모하는가로 결정된다고 하며 원시시대 사치의 의미를 읽어냈다. 사치의 원형은 가치 있는 물건의 축적이 아니라 기부형태의 소비였고, 이를 통한 명예 획득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럭셔리, 계층의 시각화

국가와 계급사회의 출현 이후 사치의 의미는 급격히 변화한다. 호화롭고 풍요로운 축제를 베푸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엄하고 화려한 겉모습은 위세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노동이 불필요한 지배계층은 번쩍이거나 값비싼 것, 크고 거추장스러운 것, 실용성과 무관한 것들로 몸을 장식하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고 우월성을 과시했다.

과시적 패션 장식으로 지배계층의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16세기의 러프 칼라이다. 러프 칼라를 착용했을 때의 그 시각적 위용은 마치 성스러운 존재의 후광처럼 경탄과 경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기에, 귀족들은 더 크고 더 화려한 장식을 경쟁적으로 사용했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겹의 러프 칼라를 독특한 방식으로 겹쳐 세워 장식하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막강한 왕권을 과시했다.

그러나 러프칼라는 실용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식사도 힘들 뿐만 아니라, 독특한 주름 모양을 유지 관리하려면 전문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들은 타인에게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실용성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날 반려동물의 동작을 제한하기 위해 씌우는 넥 칼라의 별칭이 ‘엘리자베스 칼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패션은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쥔 부유한 자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과 분명히 구분되기를 원했고, 때로는 강력한 법적 규제를 통해 특정 패션을 독점하며 계층의 구분을 시각화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이다. 페키니아 조개에서 얻은 이 값비싼 염료는 황금보다 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개 하나에서 아주 극소량의 염료를 얻을 수 있었기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고, 염료를 추출하는 과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권위의 상징이었는데, 특히 이 티리안 퍼플은 고대부터 중세시대까지 황제와 최고위 귀족에게만 허락되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본인 이외에 감히 티리안 퍼플을 사용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계급사회에서의 사치는 지배계급의 특권이자 사회질서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거대하고 비실용적인 러프칼라는 노동할 필요가 없는 계층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by Michiel Jansz. van Mierevelt, 1628 (public domain)
'Born to the purple'이라는 관용구처럼 퍼플은 곧 왕족을 의미했다. 조지6세의 초상. by Sir Gerald Kelly, 1938-45 (public domain)




럭셔리, 사치의 여성화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사치는 오히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사회적 리더는 남성들이었고, '숭고하고 관대한' 사치라는 행위는 남성들의 특권이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패션의 역사에서도 정치˙경제적 권력은 언제나 남성들의 것이었기에 남성 복식의 호화스러움은 여성복에 뒤지지 않았다.

서구 패션의 역사에서 여성 우위의 사치 문화가 보이는 시기는 18세기이다. 이때부터 남성복은 점차 간소해져 오늘날의 신사복과 같은 형태를 갖춘 반면, 여성복은 여전히 화려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사학자 설혜심 교수는 계몽주의 시대의 남성들이 사치 관행을 여성 몫으로 떠 넘긴 것이라고 해석한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치를 탐구해 의미를  구분하려 하고, 사치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근대사회에 어울리는 '이성적 시민’인 남성들은 사회의 악덕인 사치에서 거리를 둬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할 수 없는 대신 아름답고 호화롭게 치장한 여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우월감을 표출했다. 경제활동에서 배제된 여성은 사치 소비의 대리인이 되어 남성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으로 취급받게 된다.

모더니티는 사치에 부패, 퇴폐, 방탕 같은 부정적 의미를 부여했고 '여성적인 것'과 동일시했다. 때문에 사치스러운 옷을 입는 여성은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다.  


사치에 부정적 의미가 덧씌워지면서 근대 남성들은 호화롭게 치장한 여성을 '소유'해 부를 과시했다. by James Tissot, 1883-1885 (public domain)




럭셔리, 예술적 물건이 주는 기쁨

19세기 산업 발전과 기계화는 일상의 풍요를 가져왔다. 대량생산으로 더 싸게 만들어낸 상품에 보다 많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획일적 대량생산이 가져온 물질의 잉여는 오히려 수공예의 가치를 주목하게 했다. 소위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다수가 접근할 수 없는 예술적 물품을 소비하여 타인과 구별 짓고자 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물품이 아닌, 찰스 프레데릭 워스(Charles F. Worth, 1858)나 폴 푸아레(Paul Poiret, 1904) 같은 쿠튀리에가 맞춰주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패션, 보석 장인 카르티에(Cartier, 1847)와 부쉐론(Boucheron, 1858)이 만든 귀금속, 마구상 에르메스(Hermes, 1837)와 루이뷔통(Louis Vuitton, 1854)이 제작한 여행가방 등에서 독특한 미학을 발견하며 세련된 취향을 과시했다. 또한 범인들로 하여금 함부로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수공업의 가격 장벽은 예술적 심미안의 기준으로 삼기에 적합했다.

럭셔리의 현대적 의미는 값비싸고 호사스러우며 세련삶의 방식, 그리고 희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소유하려 위해 기꺼이 지불하는 기쁨이라   있다.

그러나 여기에 럭셔리의 딜레마가 있다. 사치재의 소비는 개인의 자본 능력을 가늠하는 지표로 작용해왔다. 오늘날 럭셔리의 소비는 종종 '물건' 자체의 가치보다 '물건의 소유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 과시적으로 행해진다.

예컨대 루이비통의 로고가 박힌 자전거는 자동차보다 비싸게 팔린다. 놀랄 일이지만 지금 이 시각 실제로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루이뷔통이라는 네임 밸류를 걷어낸다면 이 상품 자체에 과연 3440만 원에 준하는 가치가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 보다 이 경우는 희귀한 컬래버레이션 상품을 점유하는 자신의 안목과 경제적 능력을 드러내는데 비용을 지출하는 쪽일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사치는 한땀한땀 공들여 제작하는 수공예 가치로 연결된다. 워스의 아틀리에, 1907 (출처: indicedexposition.wordpress.com)




럭셔리는 너그럽게 베푸는 정신, 계급과 권력의 표현, 근대 질서에 맞지 않는 여성적인 것, 그리고 예술적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으로 그 의미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그러나 타인을 의식한 소비를 통해 자기를 확인하려는 점에서 럭셔리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명망을 얻기 위해 너그러움을 과시하던  원시시대의 사치 조차도 타인의 시선과 평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세련된 취향과 심미안을 증명하기 위한 현대적 의미의 사치가 자기 자신의 기쁨을 우선시한다고 해도,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시장논리를 벗어나는 높은 가격을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특히 오늘날의 럭셔리 소비는 브랜드 로고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고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에 더욱 타인을 의식한다.


나는 지금 금욕적 삶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고, 우리가 일상에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은 필요 이상의 사치가 스며들어 있다. 다만 럭셔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나의 태도를 주체적으로 정립하자는 것이다.

 

기쁨의 감정 또는 우월감

향유 혹은 과시욕


사치로 인한 나의 깊숙한 감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챈다면, 타인의 평가에 함몰되지 않고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소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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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래치(potlatch)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손님을 초대해 향연을 베풀고 선물을 하는 풍습으로 '소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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