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음

by 초동급부

삼철에게..

잘 있었어? 오늘 날씨 정말 춥드라. 서울이 -6도.
근데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는 영하 16도래 정말이지 엄청 추웠어. 옷을 4겹씩 껴입고, 목도리 두르고 장갑끼고 완전무장을 해도 왜 그리 추운지... 거기도 많이 추웠겠다.

그래두 다행이야. 나는 네가 계속 초소근무를 해야 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아주 추워지기 전에 상황실에서 근무 서게 돼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춥지도 않고 좋잖아.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하고 그렇지?

오늘은 우리 옆 사무실 사람들이랑 볼링쳤다.
옆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같은 직원이나 다름없어. 왜냐구? 사장이 같은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같은 직원이지 뭐. 사무실만 따로 쓸 뿐... 우리 사무실이랑 그쪽 사람들이랑 3명씩 조를 짜서 내기게임 했는데 우리 조가 2등 했다. 전부 3조였거든. 다들 빠지고 애인 없는 사람 9명만 모였다.

근데 우리 팀 2등 한 거 전부 나 때문이다. 내가 젤 못 쳤거든.
난 왜 운동신경이 이리 둔한 지 몰라. 다른 사람 다 잘 타는 자전거두 난 탈 때마다 배워야 하고, 스케이트는 아예 중심 잡을 줄도 모르고 포켓볼은 좀 잘 치면 요행이라 질 않나. 이러면서 운전면허는 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따도 내가 과연 차를 운전할 수 있을까. 겁도 많고 그래서 못 할 거 같애. 도전이야 해 보겠지만 영 자신도 없어. 괜히 돈만 버리는 짓 하는 거 아닐까? 나중에 좋은 사람 만나면 그때 가르쳐 달라고 할까?

근데 넌 볼링 잘 쳐? 하기야 남자들은 힘이 있으니깐 못 쳐도 120은 나오던데. 너두 그렇겠다. 너 힘 좀 세잖아. 쪼끄만 게 힘은 왜 그리 세냐? 너 옛날에 밥 먹구 싸움만 했지. 이제사 알겠다 그치?

아까 오후에 전화했었어? 나 잠깐 없는 사이에 걸었던 거니?
음... 나 배가 고파서 언니랑 뭐 사 먹으러 갔었거든. 우유랑 초코파이랑 먹으면서 또 1층서부터 7층까지 올라왔어. 그 사이에 전화했었구나. 잠깐 나가면서 전화기 가지고 다니지 않잖아. 근데 섭섭한 거 있지. 좀 배고픈 거 참고 그냥 앉아있었으면 네 전화받았을 거 아냐.

근데 참 아버지 생신 때 나올 수 있는 거야? 나오게 되면 언제 알려 주는 거야? 못 나오게 되면 연락해주면 좋겠다. 그래야지 그날 너 면회라도 가지. 아무런 연락도 못 받았는데 그날 너도 나오지 않는다면 하루 공치는 거잖아. 나오게 되더라두 미리 연락하구. 그래야 나두 준비를 하고 너 마중 나갈 거 아냐. 너 충주에서 출발하기 전에 연락하면 내가 늦을 거 같애. 미리 알려 주면 다 준비하고 네 전화만 기다리면 되잖아. 근데 내가 이 얘길 벌써 몇 번째 물어보는 건지 원... 참...

날이 추워. 감기 조심하구. 그럼 다음에 또 편지 쓸게.


1999. 1. 7.


삼철아!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할 일은 참 많은데 멍하니 딴생각만 하다가 하루를 마감하곤 해.
1월부터 3월까지가 가장 바쁜 기간이라는데 그래서 할 일도 태산
같은데 나 왜 이러지. 뭔가에 쫓기고 있는 거 같애. 불안하고 답답
하고, 한마디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야.

항상 웃으면서 생활하고 싶은데 회사 들어와서는 찡그리는 날이
더 많아. 이렇게 변해가는 내가 싫어. 좋은 쪽도 아닌 나쁜 쪽으로
말야. 어딜 가든지 편하지만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두
그래두 이건 아닌 거 같애.

나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좋은 결론을 내가 만족할 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그냥 머리도 식힐 겸 어디라도 다녀오면 이런 기분이 좀 덜 할려나?


99. 1. 7. 회사에서


공군 헌병은 기지 출입문들을 통제하고 외곽의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선다.

충주 제19전투 비행단에는 약 20Km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펜스에 광망, CCTV 카메라, IR(적외선) 카메라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적의 침입으로 이 광망에 충격이나 절단이 발생하면 소대 상황실에 알람이 뜨고 해당 구역을 IR카메라가 자동으로 포착하여 영상을 보내고 CCTV 모니터도 해당 구역에 고정된다. 이런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상황실장은 출동명령을 내리고 24시간 대기하는 기동타격대는 즉시 K장갑차를 몰고 출동하여 적을 소탕한다. 그래서 상황실에는 전면에 수십대의 CCTV 모니터와 다수의 IR 카메라용 대형 모니터가 있고 녹화 장비 등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S사에서 시공한 당시의 최첨단 무인 기지경비 시스템으로 공군은 당시 19비행단이 유일했고 내가 있었던 소대에 가장 많은 IR카메라가 있어 여러 국가기관에서 구경도 많이 왔었다. 공군참모총장은 물론이고 청와대 경호실, 국정원에서도 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랏돈 수천억이 들었다고 들었는데 난 당시도 지금도 이해를 할 수 없다. 남한의 한가운데인 충주에 북한군이 쳐들어올 정도면 전면전이 벌어지고 육군보병이 투입되고도 한참 뒤일 텐데 최첨단 장비는 무슨 소용인지, 게다가 무인 시스템이 쫘악 깔려 있음에 불구하고 인력은 그대로 근무에 투입됐다.


최소 상병 말호봉은 되어야 상황실장 보조로 상황실에 입성할 수 있었는데 일병을 단 내가 보조가 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참들만 일을 으니 시스템을 이해하고 다룰만하면 제대를 해 전문병사가 없어 일병을, 그것도 나를 콕 찍어서 투입·학습을 시키라는 헌병대대장의 지시가 있었단다.


법무관실 파견, 수사계 차출이 잊힐만하니 이제 상황실 투입이었다. 내 위의 고참들은 아직도 밤낮없이 초소와 출입문 근무를 서는데 나는 교육을 받으며 상황실 기기들을 만지고 PC를 조작했다. 내 마음도 몹시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경비5소대 내 갈굼 0순위가 되었다. 저놈은 대단한 뒷배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여 체념하는 분위기까지 느낄 수 있었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한마디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같은 날짜 같은 봉투, 쓴 장소만 다를 뿐인데 내용은 사뭇 다른 그녀의 포스트잇 편지처럼 은경이와 나의 마음도 비슷했던 때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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