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그때 떠나셨다면 ...
다행이 아버지는 다음날 늦게 겨우 눈을 뜨셨다. 눈을 뜨고 우리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다시 눈을 감아버리신다. 동생이 얼음장 같이 차가운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이대로 돌아가셨다면 우린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을 것이다. 아빠가 우리 마음 편하게 하려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오신 것 같아 너무 감사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빠를 위해서는 차라리 그때 손을 놓아드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때 떠나셨다면...
아버지의 혼수상태의 원인은 당 쇼크였다. 요양원에 들어간 3주가 아버지에겐 끔찍하게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의식을 되찾으신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셨고,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일반 병동으로 가면 간병인 빼고는 누구도 면회가 안 된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중환자실에서는 되던 면회가 일반 병동으로 가면 등록된 간병인 외에는 아무도 면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교대도 안 되고, 24시간, 아버지가 퇴원할 때까지 한사람이 전담해서 간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양원에 이어 병원까지 환자와 보호자에 대한 배려는 없고, 오로지 코로나를 핑계로 자기네들 편한 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당시 초기 코로나 확산의 주범이었던 교회 예배는 그대로 두고, 주로 고령의 치매 환자들이 있는 요양기관은 면회 금지, 게다가 보호자의 절대적인 관심이 필요한 병원 또한 면회 금지. 어이없는 것은 어떤 곳은 되고, 어떤 곳은 안 되고 중구난방, 제 각각. 질병본부에 확인하면 권고 사항이라며 병원에 얘기하면 된다고 병원에 얘기하라고 하고, 병원은 질병본부의 명령이라며 안 된다고 한다. 서로 나 몰라라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하다. 반발이 심할 것 같고, 표심에도 나쁠 것 같은 교회는 건들지도 않고, 만만한 노인네들만 때려잡는다.
이제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치매 상태도 더 심해져 본인의 앞가림을 전혀 할 수 없는 아버지였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소개해주는 간병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교대라면 몰라도 24시간, 매일 전담해서 아버지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퇴원시킬 것이 아니라면 병원 측 말에 따라야했다.
퇴소시킬 것이 아니라면 요양원 측 말에 따라야했다.
이들에게 이렇게 무소불위의 칼자루를 쥐어준 정부의 정책이 원망스럽지만, 거부하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거부하면 갈 곳이 없는 몸도 마음도 아픈 환자의 보호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림막이나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얼굴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화상 통화라도 하게 해달라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아버지를 맡겨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한 을이었다.
얼마 전 방송에 면회 금지된 요양원의 실태가 보도된 적이 있었다. 대낮에도 침대에 누워있거나 묶여있는 노인네들. 무슨 말만하면 주사를 놓아 재워버린다. 한때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의 주인공들이었고,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우리의 부모님들이 치매라는 이유로 요양시설에 갇혀 화학적 구속을 당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멀쩡히 걸어 다니시던 아버지도 단 3주 만에 엉덩이와 발뒤꿈치에 욕창이 생기셨고, 손목고 발목은 시꺼멓게 멍이 들었다. 아버지처럼 멀쩡히 걸어 다니시는 분이 이 정도가 되려면 약으로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미동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장시간 묶어 놓아야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 물론 요양원을 나오려고 하는 아버지를 묶어도 좋고, 약을 드시게 해도 좋다고 동의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밤낮없이 묶어놓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사자는... 아버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정신이 나가실 때보다는 제 정신이실 때가 더 많았다.
제 정신이 드셨을 때, 그 비통함과 참담함이 어떠했을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차라리... 아버지가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으면 좋겠다.
본인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