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을 가지고 죽기 위해
사는 세계가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전 같으면 애잔한 로맨스 영화로 보였을 영화 미비포유(me before you). 아버지가 아픈 이후 다시 본 이 영화에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읽혀졌다.
촉망받던 젋은 사업가 윌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다. 한편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아 졸지에 백수가 된 루이자는 6개월간 윌의 간병인으로 일을 하게 된다. 처음엔 루이자에게 까칠하게 굴던 윌은 점점 루이자의 순수한 매력에 빠지게 되고, 루이자도 윌의 아픔을 이해하며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이 사랑도 윌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하는데...
사실 간병기간이 6개월이었던 것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윌이 6개월 후 스위스 병원에서 죽기로 되어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루이자는 윌의 안락사 결심을 바꿔보려 애쓰지만, 아침에 눈을 뜨는 유일한 이유가 루이자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는 윌은 루이자의 간절한 부탁에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는다.
“나는 이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난 이렇게는 못 살아...
고통과 피곤함도 지겹고,
아침마다 죽기를 바라며 눈을 뜨는 것도 싫어.
무엇보다 난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아”
마지막 순간 함께 있어 달라는 윌의 부탁을 거절하고 떠나는 루이자. 그러나 결국 윌이 죽기로 한 스위스에 있는 병원으로 찾아간다. 윌은 아름다운 스위스의 풍광이 펼쳐진 병실에서 사랑하는 부모님과 루이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의 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존엄을 가지고 살기 위해
존엄을 가지고 죽기 위해
스위스에서는 죽음이 임박하지 않았더라고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에 따라 약물 등을 사용해 환자를 죽음을 돕는 적극적인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얼마 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여든이 넘은 나이에 두 번의 뇌졸증 수술로 건강이 악화되자 “우리는 병원이나 생명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며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온라인에서 화재가 되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편안한 삶이 이 세상엔 존재합니다.
2021년 대한민국 군 입대를 준비하던 한 청년이 존속살인혐의라는 끔찍한 죄명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 청년은 중병을 앓던 아버지를 방치해 굶어 죽게 만든 혐의로 징역4년에 처해졌다. 청년의 아버지는 지난해 9월 목욕을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7개월간 병원에서 투병생활을 하였다. 아버지의 상태는 혼자서는 거동을 할 수 없고, 정상적인 음식 섭취가 어려워 코에 호스를 연결해 치료식을 주입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아들은 입대를 연기하고 돈을 벌려고 취직 하려 애썼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한 달 내내 깻잎 장아찌만 먹어도, 월세, 생활비에 병원비까지 감당할 수 없었다. 병원비가 2천만 원이 넘어가자 더는 감당할 수 없었던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퇴원시키고 집에서 돌보게 된다. 아버지의 식사는 물론, 욕창 방지를 위해 두 시간 마다 체위 변경, 대소변 치우는 일 등 아버지를 돌보면서 아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쌀 사 먹게 2만원만 빌려주세요.”
청년의 엄마는 청년이 어렸을 때 집을 나갔고, 왕래도 없던 삼촌이 조금씩 청년을 도왔지만, 삼촌 역시 어린 아이들이 있는 가장으로 더는 도움을 주기 힘들어지자, 월세가 밀린 집주인에게까지 10만원을 빌리는 등, 막다른 골목에 몰린 청년은 ‘이렇게는 살기 어렵겠다. 그냥 돌아가시게 둬야겠다.’고 결심 하게 된다. 가능하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차마 외면하기 힘들어 아버지가 부르면 방으로 들어가 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굶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아들에게 물이나 음식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부를 테니 들어오지 말라”고 오히려 단호하게 아들을 내쳤다. 아들은 울먹이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렸고, 아버지가 부를 때까지, 돌아가실 때까지... 자기 방에 틀어박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경제력이 없는 아들에게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간병은 아버지나 자신,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 수 있는 길고도 끔찍한 길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들의 행복을 바라던 아버지는 죽었고, 아버지를 눈물로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들은 살인자가 되었다.
한 청년의, 아니 한 인간의, 아니 한 가족의 삶을 통째로 내던져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비극 앞에,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발버둥 치던 청년은 아버지의 손을 놓은 순간 살인자가 되어버렸다. 알랭들롱은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위스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단다. 아버지의 죽고자 하는 뜻을 받아들인 두 청년. 둘 다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아들들이었지만, 한 명은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들로, 한 명은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 살인자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