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우리나라는 안락사가
인정되지 않는 나라이다.
2018년부터 시행된 웰다잉법(well dying)이 있긴 하지만, 이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줄 뿐이다.
처음에는 연명치료거부라고 해서 환자가 원하면 응급 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기관절개 등의 의료행위를 거부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관련단체에 확인해보니, 일단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오면 환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설사 사전연명연장거부 신청을 이미 해놓은 환자일지라도, 환자를 살리기 위한 응급처치가 행해진다고 한다.
일단 죽을 고비를 넘긴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지는데, 이때 많은 수의 환자가 회복 될 때까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도 중환자실에 머물면서 온갖 의료장비에 의지해서 생명을 연장해간다고 한다. 이때 사전에 연명연장 거부를 신청해놓은 사람은 이러한 중환자실에서의 치료 중단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이것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환자는 보호자 두 명의 동의하에 거부 의사를 밝힐 수 있다고 한다.
구지 살려놓은 다음에 연명 치료 거부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난 좀 납득이 안됐다. 회복 가능한 환자일 경우야 당연히 살려내야겠지만, 회복 불가능한 환자일지라도 일단 무조건 살려내고 그 다음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확인한다는 것이 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환자들의 경우, 일단 살려놓는다는 것이 과연 이들을 위해 최선일까...
이것은 우리나라가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응급상황에서는 일단 사람을 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종합병원과 요양원간의 ‘죽음의 사이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요양병원을 알아보며 상담을 받던 난 아버지가 이러한 ‘죽음의 사이클’을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빠와 같은 고령의 치매환자들의 경우,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면 요양원에서는 아버지의 경우처럼 앰뷸런스에 태워 종합병원 응급실로 모셔간단다. 그러면 종합병원에서는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내 다시 요양원으로 보낸다고 한다. 요양원에서 지내다 다시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다시 종합병원으로, 살아나면 다시 요양원으로, 그러다 다시 종합병원으로, 다시 요양원으로...이렇게 종합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는 사이클은 환자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고 한다.
이 사이클을 돌며 경제적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보호자들은 지쳐가고, 환자들은 죽지도 못하고 고통에 찌들어간다고 한다. 환자도 보호자도 원치 않은 이 죽음의 사이클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대한민국 고령 환자 치료의 실상이고, 고령의 치매완자가 요양기관의 소위 “봉”이 되는 이유다.
일 년이 채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우리 가족 역시 전쟁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요양원으로, 그리고 병원으로, 그리고는 요양병원으로, 그리고 현재는 다시 요양원으로.
치매3등급 판정을 받은 아버지는 요양원 비용을 일정금액 국가에게 보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달마다 이런저런 비용을 합쳐 백만 원이 넘는 비용을 지불해야했다. 게다가 진짜 많은 돈이 들었던 중환자실 병원비, 한 달에 삼백을 호가하는 간병비, 그리고 만만치 않은 요양병원 비용은 한 푼도 지원되지 않는다.
암이 치매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은 끝이 보여서라고 한다.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치매의 경우 매달 돌봄을 위해 지출하는 비용 부담은 끝을 알 수 없기에 더더욱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통계에 따르면 치매환자의 경우 돌봄 기간이 평균 6.5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는 10년째 요양원에 계시는 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비용이 이렇게 만만치 않다보니 요양기관에 못 모시고, 집에서 독박 돌봄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최근 뉴스에 심심치 않게 보도되는 것이 “간병살인”에 관한 기사다. 그리고 노인자살에 대한 기사도 많이 접한다.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은 OECD국가 중 1위이고, 무엇보다 놀란 것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고령화 사회에 도달했던 일본보다도 두 배나 많은 숫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 영화 "미비포유"의 멋진 남자 주인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아주 씁쓸한 자본주의의 현실만이 보였다. 모든 것을 가졌던 멋진 남자의 비극적인 죽음보다는, 스위스의 아름다운 병원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을 수 있는 그의 재력이 먼저 보였다. 세기의 미남, 알랭들롱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나보다’하는 안타까움보다는 “병원이나 생명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며 죽음조차 선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부러웠다.
죽음의 빈부격차!
돈 있는 사람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고, 돈 없는 사람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
가족 중 누군가로부터 죽임을 당하거나, 정말 지독하게 용기내서 자살을 하거나,,,
그러나 이것도 소수 몇 명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지, 보통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견뎌내야 한다.
태어나는 것은 마음대로 안됐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인 만큼, 죽음은 나의 선택이고 싶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내가 내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날이 온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날이 온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살아 갈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내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 나라가 나에게 이런 선택권을 주지 않으니, 돈을 벌어야겠다.
내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갖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