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대로 두지 마라'
시간이 지날수록 요양병원에
계시는 아버지의 색감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 이 병실에 들어 올 때만 해도 아버지는 자신은 살아있다고 말하는 듯, 흑백의 다른 분들과는 다른 생명의 총 천연 색감을 뿜어내고 계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난 상처들은 아물어가고 있지만, 아버지의 눈은 점점 초점이 사라져가고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이 되어갔다. 이런 저런 것을 물어보면 어눌한 말투로 겨우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다였다. 너무 순해졌다기보다는 너무 멍해진 것 같은.... 예전에 섬망증 약을 먹었을 때의 모습과 비슷한, 아니 사실 그때보다 훨씬 심해 보였다.
예전에 아버지의 치매증상이 칼을 들고 다닐 정도로 심해졌을 때, 뒤늦게 이것이 섬망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치료약을 드시게 했었다. 아버지는 그 약을 드시자마자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초저녁부터 잠도 잘 주무시고 폭력성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물론 그 때도 잠시 한눈을 팔면 염색약으로 양치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엄마는 저녁에 잠만 잘 자도 살 것 같다며 이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었다. 그러나 그 약을 드신 후 아버지는 말을 잘 못 하셨다. 어눌하게 “말이 잘 안 나온다”며 말끝을 흐리곤 하셨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밤에 소리를 많이 지르신다고 한다. 그래서 약을 좀 드시게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종합병원에서도 전혀 소리를 지르시지 않던 분이셨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분들 주무시는데 아버지가 소리를 지른다면 병원 측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 같긴 하다. 답답하셨나... 종합 병원에서는 어찌됐든 아버지의 전담 간병인이 있어서 옆에서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미동도 없이 누워계시는 3명의 환자들과 함께 하루 종일 침대에서 tv만 보고 계셔야 한다. 요양원처럼 다른 분들하고 함께 그림이라도 그리고,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상대가 없다. 그렇다고 그 호된 일을 당하고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믿고 맡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아버지가 어느 날 밤 몰래 기어이 소변줄을 빼버리셨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 ‘나를 이대로 두지 마라’는 외침이었을까...
진작부터 제거해달라고 병원 측에 여러 번 부탁했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아직은 안 된다는 답변만 들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직은’ 일지 모르겠지만, 차일피일 미루면서 벌써 몇 주 째 착용하고 계셨었고, 그러면서 아버지의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열망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난 다시 한 번 아버지가 화장실을 스스로 갈 수 있게 신경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옛날, 아버지가 치매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알아봤던, 그리고 예약해두었던 시립요양원에서 자리가 났다고 연락이 왔다. 서울은 대기시간이 최소 1년 이상이라 경기도에서도 알아봐 대기 시간이 짧은 곳들은 예약해 두었었다. 그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우리는 의사와 상담을 해보고 가능하면 요양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다행히 의사선생님은 치매환자의 경우 가정에서 돌봄을 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아버지 같은 경우는 집에서 돌보기 힘들다며, 환자를 위해서는 병원보다는 요양병원이, 요양병원보다는 요양원이 좋다며 흔쾌히 옮기라고 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새 보금자리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단 코로나 검사부터 다시 받아야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코로나 검사만 3번쯤 받으셨다. 그때도 발열 등의 증상이 있으면 일반인들은 무료로 검사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세 번다 제 돈 내고 검사를 받아야했다. 응급실에 실려 갈 때도, 미열이 있다고 이 병원 저 병원에서 거부당하고, 겨우 대기 가능한 병원에서도 일단 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다. 코로나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 중에 한명인 아버지는 기관마다 요구하는 검사 확인증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몇 번씩 검사를 받으며, 매번 돈까지 내야했다.
정말 뺨 때리고
돈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누구는 유료, 누구는 무료. 초기 전파 주범 교회 예배 참석자는 무료, 집에만 있고 감옥 같았던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던 아버지는 유료.
게다가 아버지가 계시던 요양병원은 코로나 검사가 가능한 병원이 아니어서, 아버지를 모시고 검사 가능한 병원까지 모시고 가야했다. 몸이 불편한 환자의 경우 검사원이 출장을 온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아 알아보니, 보호자가 자비로 앰뷸런스를 불러 검사 가능한 병원까지 모시고 와야 한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검사확인서를 요구하려면 검사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나 제대로 마련을 해주던지. 환자의 불편함 따위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안하무인적인 요구에 짜증이 났다. 관련기관에 항의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 우리의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시립요양원에서는 며칠 내로 답변을 주고, 입소를 원하면 일주일 이내로는 입소해 달라고 했었다.
그제야 최소 내년까지는 기다리라던 시립요양원에서 대기번호 한참 뒤였던 아버지에게 이렇게나 빨리 연락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코로나로 아빠 앞의 많은 대기자들이 자기 순번이 와도 요양원을 옮긴다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힘든 시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한참 뒷번호인 아버지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우리는 시립요양원으로 갈 수 있는 이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번 뒤로 밀려나면 이백 명 가까이 되는 대기자 뒤로 번호가 넘어가, 언제 자리가 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호되게 당한 민간 요양원으로는 다시는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 우리는 요양병원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동원, 아버지를 코로나 검사 병원까지 모셔가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립요양원에서도 우리의 사정을 배려해줘 한 주 더 기다려줬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아버지를 시립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