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 386
하윤경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하윤경의 출연을 상상하며 만들어 보는 캐릭터
이름: 윤경화
제목: 햇살보다 반짝이는
“고마워요 선생님.”
“뭐가, 뭐가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로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엄마를 보고 경화는 눈물이 팽 돌았지만 참고 참았다.
창밖으로 스미는 겨울 저녁 햇살이 병실 천장 위에서 아련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때로는 저마다 흐릿해지고, 때로는 또렷이 보이는 빛의 흔적들이 긴 복도 저 끝까지 이어지던 그 풍경이, 경화에게는 왠지 모를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빛을 받으며 엄마 ‘현주’가 침대 머리맡에 조용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경화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한참을 멈춰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약간 떨리며 공중을 헤집는 모습이 보이자, 그마저도 애처로워 가슴이 옥죄어 왔다. 예전 같았으면 엄마의 손짓 하나로도 가족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하곤 했었다. 결코 약해보이지 않던 그분이, 이제는 스스로 젓가락조차 들기 힘들 때가 많았다.
‘병세가 또 진행됐나…’
경화는 어머니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나 엄마는 경화를 보자마자 눈을 깜박였다. 어딘가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가 “저건 누구지?” 하고 묻듯 머릿속을 도리질하는 듯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딸의 얼굴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나, 경화야.”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 경화는 꽤 힘을 주어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가만히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경화…? 경…화?”
하고 끝맺지 못한 채 머릿속을 헤매는 듯했다.
순간, 경화의 눈에 뜨거운 것이 고여 올라왔다. 매번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아직도 눈물샘이 바싹 말라버리지 않은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고통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엄마가 어릴 적 아버지를 계속 언급한다는 점이었다. 실은 치매가 점점 심해지면서 대개의 기억은 사라져 가는데, 유독 ‘아버지와 함께했던 한 시절’만은 놓지 않으려 애쓰셨다. 병실에 앉아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단어 중 상당수는 “네 아빠 참…”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곤 했다.
그러나 경화가 태어난 뒤로 아버지는 곧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경화에게도 그 얼굴은 앨범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경화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짧았을지 몰라도, 어머니가 아버지를 잊지 않으려 한 시간은 끝이 없었다.
경화는 그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팠다. 엄마가 자신을 놓쳐도 괜찮으니, 적어도 아버지의 흔적만은 마음속에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경화는 도리어 엄마를 위해 아버지를 더 자주 이야기했다.
“저기요, 엄마. 아빠 사진 또 볼래요?”
앨범을 펼쳐 보이면 어머니는 비록 사소한 고개짓이지만 순간적으로 반가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을 볼 때마다 경화의 마음은 만 갈래로 흔들렸다.
“나도 엄마 딸인데, 굳이 아버지 이야기만 해야 엄마가 웃는구나”
엄마가 웃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경화가 병실 밖으로 잠시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상상조차 못할 일이 벌어졌다. 복도 창문 너머로 마치 오로라처럼 아른거리는 빛이 일렁인 것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빛의 흔적’. 그것은 허공을 휘감으며 묘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언뜻 보면 조명 꺼짐의 오류나 착각일 수 있지만, 곧 경화는 비정상적이라고 느꼈다. 그 빛은 사물 그림자와 전혀 상관없이 공기 가운데서 맴돌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경화는 온몸이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 치다가 “뭐지?” 하고 목소리를 죽였다. 그 순간, 이상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자신의 귀를 스쳤다.
‘과거를… 바라봐…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설마 헛것을 들은 걸까? 경화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스산한 정적 속에서, “내가 피곤해서 환청을 들었나 보지”라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본, 특수한 ‘시간의 균열’ 같은 건 아닐까 그런 유치한 상상조차 떠올랐다.
‘엄마의 과거로 향해, 뭔가를 고칠 수 있다면… 엄마의 병이 낫거나, 적어도 덜 힘들게 살 수 있을까?’
이쯤에서 초현실적인 망상을 접고 싶었지만, 엄마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심지어 아버지를 살릴 수도 있다면? 이미 오래전에 떠나버린 아버지가 다시 살아 있다면, 경화 역시 수십 번은 생각했었다.
“나는 이런 운명이 아니었을 텐데”
그렇게, 어느 날 밤.
경화가 깊은 잠에 빠져든 순간, 아까 그 복도에서 보았던 기묘한 빛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젠 복도뿐 아니라, 경화의 꿈속에 아로새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얀 방 안에서 경화가 깨어나 보니, 주변은 이미 1980년대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문득 코끝으로 스치는 흙냄새, 밤하늘에 은하수가 퍼져 있는 모습… TV나 사진으로만 보았던 과거 시골의 한 장면이, 너무 생생했다.
“여기 어디야?”
경화가 중얼거리자, 마을 어귀에서 등을 켠 다방 간판이 언뜻 보였다. '기와 지붕’을 얹은 낡은 건물에 '사랑찻집'이라 쓰여 있었다.
그 순간 경화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릴 때 앨범 사진 속에서, 엄마가 자주 언급했던 ‘다방’이 바로 여기구나 싶었다.
설마, 정말로 과거로 오게 된 건가? 믿기 힘들었지만, 발 밑에 느껴지는 돌멩이 감촉이 너무 리얼했다. 공기마저 묵직하게 차가웠다.
그러다, 한쪽 골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이끌렸다. “에헤헤” 하는 맑은 웃음소리,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의 낮은 음성이었다. 둘 다 젊은 목소리처럼 들렸다. 경화는 가슴이 뛰는 걸 느끼며 천천히 그 골목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곳에… 바로 젊은 시절의 엄마가 있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즉 현주는 경화의 또래 같았다. 머리는 어깨까지 단정하게 내려오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옆에는 낯선 친구가 있었는데, 두 사람은 해맑게 수다를 떨다가 경화를 발견하자, 낯선 이가 왔다며 빤히 쳐다봤다. 순간 경화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경화를 구경하듯이 반가운 웃음을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 근처 사시는 분은 아닌 거 같아요.”
엄마가 먼저 말을 걸었다. 경화는 심장이 쿵쿵거렸다. 저분이, 내 엄마라니.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은 앨범 사진보다 훨씬 생기 넘쳤고, 아직은 건강한 미소가 가득했다.
경화는 한껏 긴장한 채 간신히 대답했다.
“아, 그게… 방금 마을에… 아니, 약간 길을 잃었어요.”
‘길을 잃었다’는 말이 거짓만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감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현주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잘 왔네. 여기 조용하고 예쁜 마을이야. 근데 밤중에 돌아다니면 좀 위험할 수도 있거든.”
경화는 믿기지 않게 울컥해졌다. 이건 정말 엄마 목소리가 맞다… 시간은 거꾸로 흘러, 아버지를 만나기 전, 혹은 만나고 얼마 안 된 시기인 듯했다.
이제부터 시작되는 과거의 사건들이 엄마의 삶과 아버지의 생사를 결정지을 것 아닌가. 그렇게 ‘경화의 과거 여행’은 시작되었다.
가장 놀라운 건, 젊은 엄마가 경화를 ‘또래 친구’쯤으로 여기며 친근하게 대했다는 점이었다. 이름을 묻길래, 경화는 순간 자기가 원래 쓰는 이름을 말해도 괜찮을지 망설였지만, 어차피 별로 티가 안 날 거라 판단하여 '윤경화'라고 그대로 말했다.
“어, 이름 예쁘다. 내 이름은 현주야. 반갑다!”
엄마가 손을 내밀었다. 경화는 떨리는 손으로 살짝 그 손을 잡았다.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으나, 그 말을 삼켰다.
며칠간 마을에 머무르게 된 경화는 과거 시대의 모습을 실컷 체험했다. 텔레비전이 흑백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보다 훨씬 작은 브라운관이었고, 밤에는 잘 안 보일 정도로 화면이 흐릿했다. 전기 장판 대신 온돌방이 있었고, 사람들은 휴대폰 없는 것도 신기했다. 동네 어귀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 모든 게 정겹고 낯설면서, 한편으론 따스했다.
“어디가? 곧장 집 가니?”
그리고 한 남자가 아버지인 듯 보이는 청년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농부의 아들처럼 소매를 걷어붙인 채, 마을 회관 앞에 앉아 종이를 보고 있었다. 뭔가를 곰곰이 계산하는 듯했는데, 경화가 다가가 보니, 가계부 같은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 삽니까?”
“네, 맞아요. 저… 이 근처에서…”
경화가 목소리를 걸어 두근대며 인사했을 때, 청년은 살짝 놀라며 웃었다.
한눈에 봐도 성실하고 수줍은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눈빛이 착하고 따뜻했다. 경화는 가슴이 저릿해왔다.
“이 사람이, 내 아버지구나.”
머리론 이해돼도,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고, 엄마와의 시간을 키워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 알잖나, 얼마 못 가 저분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엄마 혼자 남아 치매로 이어지는 그 긴 세월을.
경화는 이 과거를 어떻게든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를테면, 엄마가 ‘더 안전하고 여유로운 삶을 줄만한 남자’를 선택하면 사고의 운명도 바꿀 수 있고, 치매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 엄마가 덜 고생할 테니, 경화 자신도 상대적으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래, 어쩌면 내가 희생하는 셈이 될지도 몰라. 혹은 내가 아예 안 태어날 수도 있어… 하지만 엄마가 건강하게 살아가신다면…”
마침, 마을에 최근 들어온 도시 남자 ‘지훈’이 더 매력적이고 재력도 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의 집안은 상당히 부유해서, 현주 부모님도 지훈과 결혼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경화는 ‘그 사람을 엄마 곁에 적극 붙여줘야 하나?’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경화는 어머니를 대하는 지훈의 태도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는 분명 세련되고 호탕한데, 왠지 모르게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느낌이었다. 현주는 그의 관심에 흔들리는 듯 보였지만, 역시나 그보다 소박하고 진솔한 청년에게 자꾸 마음이 쏠리는 눈치였다. 지훈이 가끔씩 보여주는 ‘거칠고 이기적인 면’도 현주가 걸려 하는 부분이었다.
경화는 속으로 탄식했다.
“그래도 안전과 편안함을 원해… 엄마, 제발 지훈 쪽으로 가!”
속마음을 외치고 싶었지만, 현주가 진짜 원하는 건 어떤 사랑인지 조금씩 느끼게 됐다. 현주가 추구하는 사랑은, 형편이 조금 어렵더라도 마음이 맞닿고 서로 아껴주는 것이었다. 지훈과 결혼하면 세간에는 안정되어 보이겠지만, 과연 현주의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한편, 경화는 스스로의 욕심을 들키고 싶지 않아, 은근슬쩍 지훈을 칭찬했다.
“저분, 잘나가고 멋있고 친절하던데? 혹시 같이 이야기해봐요”
“음, 잘 모르겠어. 그래도 아직은 마음이…”
며칠 뒤, 아버지가 마을 축제 준비를 하다 사고로 크게 다칠 뻔한 일이 생겼다. 경화는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이것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조인가? 그러나 그 사고는 경화가 재빠르게 달려들어 막아내어 다행히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지금 죽었다면 자신은 없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운명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경화의 마음 한편에는 희망이 차올랐다.
그러나, 곧 알게 된 사실은, 그 ‘사고’가 운명을 바꾸기엔 너무나 작은 흔들림이라는 것이었다. 더욱 결정적인 ‘죽음의 순간’이 훨씬 뒤에 있었다는 걸, 경화는 여러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눈치챘다.
“그 청년 곧 머나먼 도시로 나갔다던데…”
“갔다가 뺑소니 사고 어쩌고…”
이런 이야기들이 소문처럼 흘러 나오는 걸 보고, 경화는 절망감을 느꼈다.
“안 돼… 다시 한 번 더.. 어떻게든 막아야 해…”
경화는 어머니를 찾아가, ‘혹시 도시로 떠나려는 남자가 있다면 가지 못하게 붙잡으면 어떨까’ 하는 힌트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현주는 오히려 하고 맑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꿈을 펼칠 수 있다면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은 그가 행복하면 좋겠다”
마치 그런 희생마저도 사랑의 일부라 여기며, 커다란 고민 없이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경화는 기가 막히도록 아팠다. 엄마가 행복하려 했지만, 그 이후 기다리는 건 치매와 외로운 세월인데… 이건 어쩌면 내 욕심이 아니라 정말 엄마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서는 아버지의 따뜻함이 엄마의 본질적인 행복 이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
‘엄마가 정말 선택해야 하는 건, 지훈의 안정된 삶인지, 아니면 이 따뜻한 아버지 와의 소박한 사랑인지?’
경화는 처음에는 무조건 ‘안전’을 택하게 하려 했지만,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점점 더 어머니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경화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엄마를 위해 이렇게 했다고 믿었는데, 그건 내가 일방적으로 판단한 거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 경화를 괴롭히는 불안감. 만약 엄마가 지훈과 결혼해버리면, 경화 본인은 태어나지 않는 미래가 되지 않을까? 자기가 없어도 엄마가 더 행복하면 괜찮다는 대담한 결심도 했지만, 막상 그 가능성이 코앞에 다가오자 ‘정말 난 사라지는 건가?’ 하는 두려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현대로 돌아오기 전, 경화는 필사적으로 아버지의 사고를 막으려 했지만, 결국 큰 벽에 부딪혔다. 그 모든 순간이 이미 운명처럼 짜여있는 것 같았다. 간혹 나비효과를 기대해 이것저것 시도해 봤어도, 마을을 떠나는 시점, 그 이후 벌어질 사고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경화의 고민을 한층 더 깊게 만들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까 이 길을 가겠다”
결국, 과거 속에서 경화는 아버지의 불가피한 죽음을 목격하지 않으면 안 될 순간까지 밀려가지만, 그때 무언가 강렬한 빛이 다시 나타나면서 경화를 휩싸았다. 그 빛은, 지난번 병원 복도에서 보였던 그것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밝고 격렬했다.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갈기갈기 찢으며 경화를 원점으로 불러오는 듯했다.
경화가 눈을 떴을 때, 천장엔 환한 형광등이 켜져 있고, 엄마가 침대 위에서 힘겹게 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꿈이었을지도. 하지만 손바닥에 남은 흙먼지 같은 자국이 그대로였고, 코끝엔 아직 ‘시골 바람’ 냄새가 남아 있는 듯했다. 가슴이 막혀오는 느낌에 경화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머니는 경화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경화…? 고맙..”
“엄마가 내 이름을…”
곧 음성이 갈라져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치매로 인해 거의 방금 전의 일도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경화가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인지하는 순간 경화는 울컥했다. 비록 짧았지만, 엄마가 또 한 번 경화를 ‘딸’로 알아봐주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아, 엄마… 과거로 갔다 왔어요. 거기서 엄마가 정말 웃고 있었는데… 그 행복, 이젠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고 싶었는데…’
경화는 침대 곁에 앉아 엄마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여전히 차분하게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수백 번을 되뇌었다.
‘엄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과거에 돌아가, 다시 한 번 더 노력해볼게. 엄마가 진짜로 원하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도록, 또 사고 없이 살 수 있도록.'
병실 창밖으로 해 질 녘 붉은 빛이 스며들었다. 무채색 같았던 병실 안에, 그 빛이 부디 어머니의 표정을 더 환하게 해주었으면 했다.
경화는 자신이 본 그 신비한 빛, 그리고 과거로의 여행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고 믿었다. 정말 조금 더 노력하면, 엄마와 아빠의 운명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은 모든 게 불확실하고, 혹여 잘못 건드렸다가 더 큰 비극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확실히 엄마는 치매에 시달린 채,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겼던 기억조차 완전히 잃어버릴 때가 머지않았다.
이제부터, 경화는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과거를 뒤바꾸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으나, 그 빛과 또 만나는 방법을 찾고, 다시 1980년대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지훈’ 과 더 많이 접촉시켜 엄마의 결정을 바꾸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운명에 맞서 아버지의 죽음을 막아볼 수도 있다.
경화의 눈은, 흔들림 없이 결의를 다졌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사고, 그리고 또 다른 남자의 등장했다.
“어머니가 정말 원하는 선택이 무엇인지. 내가 막거나 도와주거나 바꾸려 할 때 과연 어떤 결말이 올지.”
그것을 알기 위해선 다시금 그 세계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병실 한구석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또 스멀거리는 빛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치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어서 와, 네가 다시 오길 기다리고 있었어”
“고마워… 우리 경화…”
경화는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희미하게를 중얼거렸다. 눈에 한 줄기 눈물이 맺힌 채. 그 모습이 경화의 마음을 찌르듯 자극했다.
“가자. 다시 갈 거야. 내 운명을 바꿀지언정, 엄마의 행복을 되찾아주고 싶어.”
이 작은 결심 하나가 어쩌면 시대를 바꿀 수도 있고, 경화 자신을 무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햇살보다 반짝이는’ 그 마지막 사랑의 기억이, 치매로 흐려진 어머니의 삶을 다시 밝힐 수 있다면… 경화는 주저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노을이 붉고 아름답게 병실 안을 물들이는 가운데, 경화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바로 그 순간, 마치 하늘 어디선가, 그 형언하기 어려운 빛의 아지랑이가 병실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경화가 손을 뻗었지만, 그 빛은 손끝을 스쳐 그냥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경화의 귓가엔 또 한 번 바람결에 묻어난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과거로 돌아가, 모든 걸 바꿀 준비가 됐다면… 다시 뛰어들어라. 기억의 균열은 열려 있다.”
경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닫았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는 걸 느끼며, 이제 때가 오면 정말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어머니의 미래를 지키리라 결의했다.
“이미 이 길에 들어섰으니”
불확실하고 신비한 여정이지만, 경화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치매가 깊어지는 어머니를 위해서, 더불어 세상을 일찍 떠났던 아버지를 위해서도 아니, 궁극적으로는 우리 가족의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햇살보다 반짝이는” 어머니의 과거,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운명을 바꾸려는 경화의 모험이 지금 막 첫 발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