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이웃 #할머니
2024.09.25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안와서 3시 50분쯤 첫 닭우는 소리를 듣고 그대로 밤을 새버렸다. 어젯밤에 도고창고에서 카푸치노를 마셔서 그런가보다. 원래 커피를 마셔도 잠은 잘 잤는데 너무 잠들기 직전에 마셨던걸까. 그래도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글을 쓸 수 있어서 뿌듯했다. 9시 마감인 카페라 한 시간 반 남짓한 시간동안 썼는데 집중해서 마음에 드는 방향을 잡았다. 커피 향 덕분에 한결 긴장을 풀고 글을 썼다.
같이 숙소를 쓰는 O님의 제안으로 아침마다 글을 쓰는 모닝 페이지를 하고 있다. 집에서 나의 아침은 플레이리스트와 인스타그램, 이불 속 뭉그적거림으로 가득한데 도고에서의 아침은 글로 가득하다. 배고프고 멍하지만 몇 글자 적다보면 정신이 깨는 과정이 좋다. 오전이 이렇게 집중이 잘되는 구나를 깨닫는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쓰기 전에 계속해서 하늘을 바라봤다. 밤을 샌 덕분에 밤-새벽-아침으로 이어지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은 까만 색에서 청보라로, 다시 연한 분홍빛을 머금었다가 연파랑으로 밝아졌다. 비슷해보일지라도 하늘은 매일 조금씩 달라서 볼 때마다 새롭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오늘 보는 풍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서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면 시간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지금은 7시 40분이다. 평소같으면 일어날까 말까한 시각인데 동네 한 바퀴 돌고 의자에 앉은 스스로를 칭찬한다. 아침 글쓰기, 저녁에는 하루 소감을 적는 나를 칭찬한다.
아침에 산책을 나가려는데 ㅁ님께서 혹시 모르니 개 조심하라고 안전히 다녀오라고 말해주셔서 든든했다. 도고마을은 무서움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말을 들으니 겁이 없어진달까. ㅁ님 덕분에 미소가 지어졌고 잘 다녀오겠다고 씩씩해졌다. 나도 주변 사람들을 응원할 일이 있을 때 힘껏 응원하고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맘껏 축하해야지.
숙소에서 내려가면 왼쪽에 애호박밭 집이 있고(호박이 빨리 떨어져서 걱정이라는) 그 집 앞에 무와 배추를 키우는 집이 있다. 마침 할머니가 냄비와 호미를 들고 나오시길래 아침 인사를 드렸다.
“뭐 캐시려고 나오신 거예요?”
“아녀 뭐 버리려고 나왔어”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아녀 방금 일어났어”
친정도 근처고 자신도 도고에서 몇 십년을 사셨다는 배추밭집 할머니 역시 비가 많이 와서 배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맞은편 애호박 사정도 들었다고 말씀드리니 비도 많이 오고 햇빛도 너무 강해서 배추도 씨대씨대(시들시들)하단다. 배추밭 왼쪽에 자리한 무밭에도 누런 무순이 구석 구석 번져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영광 분이라 무를 ‘무’, ‘무시’라고 부른다고 하니 충청도에서는 ‘무’, ‘무수’라고 한다고 알려주셨다.
발길이 닿는대로 걸었다. 도고상사는 자주 가는 길이니 부러 다른 길을 골라 걸었다. 해원사가 있는 오르막길 너머가 보이지 않아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걸었다. 왼쪽에는 해원사, 오른쪽에는 마을의 다른 집들에 비해 최근에 지은 집이 있었다. 1층에 차고가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마당과 집이 있는 모양새였다. 오르막길을 걸어가니 벚나무 길이 있었다. 봄에는 연분홍빛 퐁실한 벚꽃이 피었겠지? 아직 가을인데 낙엽 하나 없이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어서 나무에게 입고있던 바람막이라도 벗어줘야할 것 같았다. 쭉 이어진 길을 걷다가 도고에서 봤던 배추밭 중 가장 넓은 배추밭도 보고 황금빛 논도 보았다. 영광 할머니 이야기가 듣고 싶어져서 전화를 하며 도란도란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전화 중에 마주친 할아버지께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는데 환한 미소로 답해주셔서 더 좋은 아침이었다.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화답(미소, 끄덕임, 눈빛, 인사말)을 받으면 괜히 나도 이 마을과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라 들뜬다.
나의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6시에 일을 나가서 점심도 안먹고 6시까지 일했다고 한다. 농사짓는 집이라 쌀이 부족하진 않았지만 예전에는 다 먹고 살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고. 할머니의 할머니가 아프셨을 때(아닌가 증조할머니를 말씀하신건가? 전라도 사투리는 바짝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데 그만 놓쳤다.) 약이 그 당시에 한 첩에 5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 물가로 환산했을 때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겁나게 비쌌다"고 한다. 약이 비싸서 꾸준히 먹을 수 없으니 할머니가 오가리(오가피)랑 이것저것 넣고 달인 물을 드렸다고 한다. 약도 비싸고 늙으면 아프니까 노인네들 죽는 게 당연한 거였다고, 아들 딸들도 사십 오십 못넘기고 죽은 집도 있는데 할매는 복받았다고 하셨다.
“아들, 매누리(며느리)도 안 물어 보는 것을 손녀딸이 물어봐서 할매가 밸(별) 이야기를 다한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왠지 신나게 들리는 건 내가 신나서였을까? 손녀딸 덕분에 아침도 맛있게 먹고 신나게 시내에 다녀오겠다고 말씀해주셔서 내가 더 즐거웠다. 꽤 오래 할머니와 통화했다고 생각했는데 발신 통화 13분. 더 자주 오랫동안 할머니와 전화해야겠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언제나 재밌고 소중하다.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오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