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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Apr 10. 2024

웹접근성이 보이다

 당장함께 모임에서 패트릭 셰르밋이 쓴 <인공와우, 언어권, ‘열려있는 미래’ 론>을 읽을 때였습니다. 이 논문은 '소아의 인공와우 수술을 반대하는 부모는 비윤리적인가'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인공와우는 말소리를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달팽이관에 있는 청신경 세포를 자극하여 대뇌에 소리를 전달하여 듣게 해주는 장치입니다. 듣지 못하는 아이가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도구를 쓰는 것에 왜 어떤 아이의 부모는 반대를 한다는 건지 이 논문을 통해 처음 인공와우 관련 문제를 접한 저는 전혀 그 이유가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저와 같으시리라 가정하고,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논문 요약본을 짧게 옮겨보겠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인공와우 수술을 해서 아이가 청각장애를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술을 통해서 아이의 청력을 회복할 수 있는데도 부모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잘못 아닌가 하고요. 실제로 이 수술을 윤리적으로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의 ‘열려있는 미래에 대한 아동의 권리’ 개념이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합니다. 인공와우 수술을 거부하는 것은 아이를 나중에 “농인 세계에만 갇혀버리게” 만든다고,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미래를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심각하게 제약”한다고요.
 하지만 셰르밋은 이런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인공와우 수술이 아이에게 매우 중요한 기본권인 ‘언어권’을 제약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언어권의 제약이 말로 오히려 아동의 미래를 닫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언어권’이라는 말은 평소 언어권이 잘 보장된 사람들, 즉 자기 생각을 아무런 지장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식조차 되지 않는 권리인데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은 소수집단들(소수민족언어, 장애인들의 수어 등)에게 ‘언어권’ 보장은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언어라는 게 단순히 의사소통 기능만 하는 게 아니라, 나와 세상을 인식하고, 내가 세상과 관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이 장치가 아이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인공와우는 착용하는 순간 갑자기 농인을 청인으로 바꾸어주는 마술장치가 아닙니다. 인공와우를 통해 말을 알아듣고 또 말을 하려면, 꽤 긴 시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공와우수술을 통해 아이를 청인집단에 넣고자 하는 부모들은 수어 대신 구어(음성언어)를 배우게 하려고 애씁니다. 인공와우수술을 통해 어느 정도 말을 듣고 할 수 있게 되어도 조금의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이의 또래집단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열등한 위치를 부여받게 되지요. 오히려 농인학교에 다니며 수어를 쓰는 농인아이에게는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 말이지요. 인공와우를 삽입한 난청아이는 의사소통이 완벽한 경우에도 자아상, 정체성 등등에서 일정한 타격을 입습니다.


  모임에서 제가 말할 차례가 되자 문제의 복잡함에 오늘도 갈 길을 잃고 헤매는 머릿속을 헤집고 제 입에서 전혀 준비하지 않은 말이 나왔습니다. '수어를 번역하는 기술의 고도화보다 인공와우 기술의 고도화가 우선시 되고 있는 것 같다. 어떤 기술의 발전이든 그 기술에는 사회˙정치적 가치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도의 말이었습니다. 

 어떤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하는 것과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큰 간격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순간이 그랬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말을 귀로 들으며 그동안 그토록 애타게 찾아왔던 기술과 장애학의 접점을 드디어 발견했다는 벅찬 기쁨을 느꼈습니다. 유레카를 외치고 싶을 만큼 흥분되었던 순간입니다.

 예상치 못한 접점의 발견은 또 다른 접점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전에 순전 프론트엔드 면접을 준비하며 외웠던 ‘웹접근성’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장애학을 읽기 시작한 지 3달이 가까워서야 그 단어가 생각난 건 일하면서 단 한 번도 웹접근성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 사이트나 네이버, 카카오 등과 같은 대기업 서비스를 만들지 않는 이상 프론트엔드 직군에서 웹접근성에 대해 고민할 일은 거의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는 2008년부터 웹접근성 관련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2008년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과 2009년 국가정보화기본법에 웹접근성은 의무사항으로 명시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2009년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2015년까지 모든 공공기관의 웹 사이트가 웹접근성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현재 웹사이트의 웹접근성 준수 여부를 평가할 때 한국은 2015년 방송통신표준 개정에 따라 ‘한국형 웹 콘텐츠 접근성 지침 2.1’ 기준으로, 모바일은 2016년 방송통신표준 제정에 따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콘텐츠 접근성 지침 2.0’ 기준으로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프론트엔드로 일하셨던 분의 경험과도 일치했습니다. 2010년대 초중반에 한창 웹접근성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24년 1월 LinkedIn에 올라온 미국의 한 Accessibility Specialist 공고

국내 취업 포털 사이트에 웹접근성을 검색해 보니 퍼블리셔의 영역으로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런 공고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습니다. 반면 해외에서는 웹접근성을 다루는 직군이 따로 있었습니다. Accessibility Specialist라는 직책으로 한국보다는 자주 공고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기본 5-7년 정도의 개발 관련 경험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고 업무의 영역도 기획부터 테스트, 팀원 교육 및 상담 등 서비스 개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위치였습니다. 

 어느 나라의 공고이든 지원자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WCAG에 대한 높은 이해도였습니다.  WCAG(Web Content Accessibility Guidelines)는 W3C에서 제작한 권고안으로 현재 웹접근성에 대한 최신 표준 지침은 2018년에 정리된 버전인 WCAG2.1입니다. WCAG2.1을 훑어보면 대부분 HTML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ML은 웹 프로그래밍을 처음 배울 때 가장 기초가 되는 기술입니다.

 

웹은 전 세계 정보를 연결 및 공유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다양한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가 존재하며, 따라서 웹 서비스는 이런 다양한 기반 시스템에 영향을 받거나 호환성 이슈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점에 대응하기 위해 적용한 기술이 HTML입니다. HTML은 전 세계 다양한 기반 시스템에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표현이 가능하도록 문서 구조를 체계화한 것입니다.(출처: 웹 3.0이 온다

 HTML은 한마디로 웹에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에 높은 난이도의 기술이 아닙니다. 웹사이트를 만드는 개발자들에게 함께 지키자는 약속에 가깝습니다. 즉, 웹접근성을 준수하는 일은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고 시간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용자에게 고소를 당할 만큼 큰 규모의 서비스가 아닌 이상 웹접근성은 안 지켜도 그만인 일입니다. 제 눈에 보이지 않았던 벽이 보였습니다. 일상에서 너무 당연하게 존재했기에 장애인을 조용히 배제하는 그 벽은 제가 매일 접속하는 웹에서도 존재했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자 웹을 넘어 접근성 문제가 제 주변에 널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없다면 물에 대한 접근성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장애물이 많다면 이동수단에 대한 접근성 문제가 생깁니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이동하지 못하거나 컴퓨터와 같이 필요한 도구가 없어서, 또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교육에 대한 정보를 적절히 제공받거나 찾지 못했을 때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문제가 됩니다. 문화˙ 사회적인 이유로 누구나 이 문제에 부딪힐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장애인들이 이러한 문제에 가장 자주 그리고 일상적으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상당수는 장애인이고, 일부는 이주민이고, 또 일부는 아픈 사람이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비인간 동물도 있다. 이들은 모두 사람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 그것도 어떤 전형적인 형상을 한 인간에게만 부여된 자격이라고 했을 대, 그 자격을 부인당한 존재, 그것으로 차별받아온 존재들이다. ⋯⋯ 이들의 간절한 요구들 중 사상의 자유 같은 폼 나는 것은 없다. 대부분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일터에 가는 것 등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본적인 일상도 보장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억압과 차별에 맞서 힘써 저항한 경우에도 이들의 행위는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도로교통법,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행정처분의 대상이다.
 그런데  나는 이들의 몸부림, 이들의 생명 활동, 이들의 삶의 의지만큼 급진적인 저항을 알지 못한다. 이들의 이동을 위해서는 세상의 이동이 필요하며, 이들의 배움을 위해서는 세상의 일깨움이 필요하고, 이들의 노동을 위해서는 세상을 새로 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7-8쪽, 고병권, 사람을 목격한 사람


 저는 이렇게 제 일에서 출발해서야 그동안 읽었던 장애학 책들에서 말하던 벽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장애인으로서 일상을 누리고 미래를 꾸려나가는데 필요한 자원에 대한 접근성에 심각한 제약이 없었던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벽들이었습니다. 장애학에서는 이 벽을 ‘비장애중심주의’라는 용어로 부릅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비장애중심주의가 어떻게 장애 운동을 동물해방운동까지 연결하는 실마리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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