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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Apr 23. 2024

한 겨울의 북토크

해야 할 것은 많은데 하루가 너무 짧아서 행복하면서도 괴로웠습니다. 달력이 12월로 넘어가자 시간에 대한 갈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팔로우한 인스타그램 속 활동가들과 단체들은 동물해방을 위한 행동들을 매일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제가 하는 공부들은 그 일들과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기만 했습니다. 

연결리스트를 C언어로 구현한 psuedo 코드를 눈으로 따라가는 일 때문에 팔로우한 단체에서 여는 시위나 행사에 가지 못할 때 특히나 그랬습니다. 자료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제 본업을 이어나가는데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게 웹접근성 전문가가 되는 시간을 앞당길지 분명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어를 공부하는 게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뒤이어 들면 안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코드가 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쓰는데도 웹접근성 전문가로 일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습니다. 해외에서 일하는 것은 돈만 있어서는 안 되고 운도 어느 정도 따라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주중은 하루 2-3시간, 주말은 다음 주를 준비하기 위한 휴식시간을 염두에 두면 일요일 하루가 고작인 일상이었습니다. 인내의 시간은 아무리 줄여도 5년은 넘어갈 듯했습니다. 5년이라는 계산은 프론트엔드로 일하려면 해야 하는 공부가 많아질수록 더 길어질 가능성이 다분했습니다. 열심히는 하는데 보상은 적은 나날에 힘이 빠졌습니다.

방통대 기말고사를 한 주 앞둔 시점에 홍은전 작가님의 신간 <나는, 동물> 북토크가 읽기의 집에서 열린다는 공지를 보았습니다. 그다음 주에는 고집사님이 본인의 신간 <사람을 목격한 사람> 시독회가 열리니 오실 분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카톡을 당장함께 단체방에 올렸습니다. 시독회는 고집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는 지인분들께 새 책을 선물하고 그날 그 책을 모두 처음 같이 읽어보는 시간이라 했습니다. 미리 읽어가지 않아도 참여할 수 있는 행사였습니다. 

컴퓨터과학과 전공학점을 1년 안에 모두 채우려고 이번 학기에 7과목을 신청했던 저는 기말고사를 두 주에 걸쳐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연히도 제가 신청한 시험일은 모두 두 행사 다음 날이었습니다. 눈치껏 연차를 써도 넘쳐나는 시험 범위를 소화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2-3과목은 어느 정도 성적을 포기해야 두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나는, 동물> 북토크 시작 2시간 전까지 망설였지만 역시 이번 행사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클라우드 컴퓨팅 교재를 들고 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을 지고 집을 출발했습니다. 이 북토크에 참여하는 게 이동시간 포함 5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에 더해 오는 길 추위로 몸과 마음이 벌써부터 피폐해진 채 읽기의 집에 들어섰습니다. 격렬한 내적 갈등 후라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 아담한 공간이 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잘생긴 리트리버 한 마리가 홍작가 님을 마주 보고 엎드려 있었습니다. 이번 북토크에 꼭 맞는 청중을 보자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북토크는 진행자 하루님이 준비한 질문을 던지면 거기에 홍작가 님이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루님의 어설픈 시작 멘트로 북토크는 시작되었습니다. 홍작가 님의 여유 있고 유머 넘치는 말들은 긴장되고 경직된 저의 마음을 풀어지게 했습니다. 

하루님이 본인은 궁금하지 않지만 어딜 가나 많이 받은 질문이라 어쩔 수 없이 한다며 운을 뗀 뒤 동물들의 처지를 보며 변하지 않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시진 않으신지에 대해 작가님께 물었습니다. 작가님 또한 이 질문을 어느 자리에 가나 받게 된다며 공감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님처럼 자신도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현재 저를 괴롭게 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제 기억에 의지해 재구성한 작가님의 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작가님은 본인이 무력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스무 살 때부터 자신이 장애운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배운 것들 덕 같다고 했습니다. 장애나 동물에 대한 문제는 모두 개인의 선의에만 기대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선의에 기대는 방식은 어떤 이유에서든 개인의 마음이 변하거나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을 때 끝나버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한 성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적절치 않습니다.  

예컨대 지금 시대에 운전하는 여자를 보고 집안일이나 할 것이지 어디 여편네가 싸돌아다니냐고 흉을 보는 남성의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본인 또한 그것이 시대착오적임을 알고 있기에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쉽게 이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문제시되려면 사회적으로 공통된 인식이 형성되어야 가능합니다. 동물에 대한 처우도 이와 같이 사회적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홍작가님 본인은 무력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동물과 인간의 잘못된 관계에 관한 문제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공적인 목소리로 접근해야 하므로 홍작가님은 이를 위해 동물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여러 단체들을 후원한다고 했습니다. 본인도 이런 자리나 신문 칼럼이나 책과 같은 지면에서는 공식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상황, 예를 들어 장애운동을 하며 몇십 년을 함께 한 지인들을 만나도 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북토크처럼 이런 이야기를 듣겠다고 모인 사람들 앞이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답을 듣고 나자 여기 오길 너무 잘했다고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 졌습니다. 홍작가 님의 말들은 그동안 제가 지켜봐 온 동물해방 활동들을 보며 느꼈던 부채감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웹접근성 전문가가 되어 프로그래밍으로 동물해방에 기여한다’라는 목표가 저를 짓눌렀던 이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그나마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길 말고는 제가 경제적으로 독립하면서 동시에 동물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습니다. 저의 목표에는 따라서하고 싶다는 설렘보다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가득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한 번 시작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수월하기에 다음 주 시독회를 갈 땐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가벼웠던 나머지 책 출간을 축하하는 선물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고집사님은 <다시 자본을 읽자>를 작업하며 자신은 글을 쓸 뿐 책을 만드는 일은 편집자, 디자이너가 없다면 불가능한 공동 작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서두를 꺼내며 이번 책을 만든 사계절 출판사 편집자님과 책디자이너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첫 번째 길동무'라는 제목의 글은 당시 노들장애인야학 학생이자 그 글 속 등장인물인 정숙님이 직접 소리 내어 읽어주셨습니다. 정숙님이 고집사님께 노들의 철학 수업을 부탁한 선생님과 교장선생님과 함께 앞으로 모셔졌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작가인 자신이 아니라 앞으로 모셔진 바로 이 분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고집사님의 마음이 읽기의 집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를 함께 소리 내어 읽고 난 뒤였습니다. 고집사님이 말하길 여기 모인 글들은 묶어 보니 모두 말하기에 실패한 글들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난 책 『묵묵』이 듣기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번 책은 말하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들은 말을 제 목소리로 다시 표현해 보는 것,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응답해 보는 시도라고 할까요. 하지만 여기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대부분이 말을 찾는 데 실패한 글들이었습니다. 이 책은 용산참사 때 자신이 목격한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의 몸짓으로 시작해서, ‘사람 살려’라는 푯말 앞에서 말을 찾는 데 실패한 제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럼에도 왜인지 저는 이 실패에서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묵묵』에서는 희망도 절망도 없는, 묵묵함에 대해 말했습니다만, 그래도 무언가 작은 희망이라도 말해야 한다면 저는 ‘말의 실패’에서 그것을 봅니다. 실패한 말은 말하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말을 찾는 데 실패한 것은, 그럼에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파농은 「흑인의 실제 경험」이라는 글에서 흑인의 경험을 설명할 말을 찾다가 마지막에 가서 엉엉 울고 맙니다. 적절한 말이 없다는 것, 그러나 그 울음이 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새로운 무언가가 도래하려면 지금의 우리가 실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말들, 기존의 생각들의 한계를 자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말로써는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실패에는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출처: 『사람을 목격한 사람』 고병권 작가 인터뷰)


 이 말을 듣자 프로그래밍 공부를 시작할 때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이번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지금 내 나이에 다시 새로운 걸 시도하기엔 이미 늦었다, 남들은 공들여 만든 스펙하나 없는 내가 이만한 대우를 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와 같은 말을 주술처럼 반복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던 저였습니다. 실패가 두려웠던 제가 보였습니다. 

그때의 제가 안쓰럽게 느껴졌습니다. 저를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한 생각들이 더 이상 저를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해졌습니다. 철저히 혼자 마주해야만 하는 이와 같은 예감을 이처럼 따뜻한 공간에 와서 해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뒤따랐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실패가 두려워 피했던 만남 앞에 서기로 용기를 내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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