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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y 06. 2024

나는 프로그래밍보다 글쓰기가 좋아

일이 끝나면 간혹 편두통이 심해 앉아있기조차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날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습니다. 당장함께 시즌5를 앞두고 특강처럼 박김영희 대표님이 줌으로 당신이 해오신 장애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박대표 님을 장애해방열사_단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고 <전사들의 노래> 인터뷰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회원 한분씩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박대표 님이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다른 모임 때는 오늘 같이 두통이 심하면 화면을 끄고 듣기도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그러면 실례라 안간힘을 쓰며 표정 관리를 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하시는 말씀이 잘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어서 두 시간이 지나길 만을 바랐습니다. 강의가 막자지로 향해가던 중 박대표 님이 본인이 정치를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장애운동에서 정치를 한다는 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시작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그걸 깨닫고 그만두었다. 정치는 그 욕망이 있어야 계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음 날 유독 기억에 남았던 그 말을 곱씹다 보니 박대표 님이 말하는 정치가 바로 저에게는 프로그래밍이라는 생각에 가닿게 되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은 분명 제가 꿈꾸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반드시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더 나은 프로그래밍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저는 사람마다 각자 끌리는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좋은 글을 읽고 말을 들을 때, 그리고 그 말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순간이 행복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살면서 앞이 깜깜할 때마다 저는 좋은 글을 찾아 헤맸습니다. 기진맥진이 되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저는 IDE를 켜는 것이 아니라 일기장을 펼쳐 들었습니다. 

하지만 3년 전 제가 이토록 좋아하는 일들은 무가치하게 느껴지기만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글을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 느끼는 열등감 때문에 제가 좋아한 일들과 관계 맺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일들은 제가 얼마나 현실성이 없고 경제관념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 제 자신이 싫었으므로 그런 스스로로부터 멀어지고 싶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은 과거의 저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들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를 열패감에 빠트릴 수 있는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프로그래밍하는 시간에는 없었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어느샌가 제 하루는 해야 하는 일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비건을 지향하는 일이 그토록 제 마음을 흔들었던 이유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먹어도 괜찮다는 개념 자체가 당시의 저에겐 무척 낯선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세 번 허기를 달랠 때마다 제가 먹고 싶은 동물성 성분이 없는 음식을 찾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고 그래서 저는 매번 ‘왜 나는 이런 고생을 스스로 사서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저의 욕구를 살피고 주변 사람들과 다른 판단을 하는 스스로의 선택을 신뢰해야 하는 순간이 반복되었습니다. 매일 먹는 일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쌓이며 저는 조금씩 저의 마음과 관계 맺는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도 별 탈이 없고 오히려 즐거워지는 경험이 계속되자 저는 저의 선택을 조금씩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조금의 용기를 낼 수 있을 만큼 저는 저도 모르는 새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만남들을 모아보니 제가 가고 싶은 길이 보였습니다. 


가고 싶은 길은 분명했지만 그걸 현실에서 찾아나가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습니다. 기대와 다르게 비질 후에도 제 마음은 여전히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며 제가 원하는 일을 할지에 대한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타성에 젖어 어제와 같은 일상을 반복했습니다. 별 수 없다는 기분을 안고 코딩테스트를 준비하며 이력서를 돌렸지만 서류 통과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불합격 통보를 받는 건 언제나 우울한 일이었지만 그보다 저를 더 괴롭게 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안에 남아있는 일말의 기대였습니다. 요행을 바랐던 저의 기대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깨닫기까지 한 달이 걸렸습니다.

콘텐츠 에디터와 언론사 기자, 출판편집자로 분야를 바꾸어 이력서를 돌렸지만 지난 한 달과 같은 결과가 반복됐습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나자 이력서를 돌리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 전 그때처럼 저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지금 사회에서 저의 노동력이 가진 쓸모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3년 전과 다르게 그 답을 저의 잘못된 판단력과 부족함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불면증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면 저는 시간에 치여 사둔 채 읽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 두었던 <전사들의 노래>를 꺼내 들었습니다. 장애해방운동가들의 삶을 새벽에 일어나 한 장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어느 날은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 들어 우울했던 때마다 습관처럼 했던 산책을 나갔습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길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니 그동안의 일을 글로 써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조금 상기되어 집으로 돌아와 뉴스레터를 시작해 보기 위한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뉴스레터 플랫폼 중 하나인 메일리에 가입하려니 기존에 운영 중이던 블로그나 SNS 링크를 요구하는 입력창이 보였습니다. 카카오 브런치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하려니 기존에 썼던 글이나 앞으로 쓸 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입력창이 다시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프로그래밍에서의 순환 참조 오류와 같은 상황에 진절머리를 내며 '프로그래밍 그만두고 글 쓸래'라는 제목을 잡고 하루종일 목차를 써 내려갔습니다. 

브런치 사이트를 포트폴리오에 올리고 이력서를 돌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콘텐츠 에디터 분야로 지원했던 회사에서 면접이 잡혔습니다. 최종 면접 합격 전화를 받자마자 지금 다니던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루 만에 저의 퇴사일은 확정되었습니다. 2년 동안 개발 일을 계속해야 하나 괴로워했던 시간은 대체 뭐였을까 허망해질 만큼 빠르고 간단했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개발자로 매일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한 것은 모두 저의 선택이자 의지였다는 사실을 씁쓸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둘 다에서 안타깝지만 저에겐 남보다 뛰어난 두각을 나타낼 능력은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 가든 잘하는 사람을 넘쳐납니다. 그럴 거면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저는 별 고민 없이 개발자를 그만둘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연재에 소개했던 지난 만남들은 저에게 어떤 말과 글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조금씩 쌓아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만남을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졌습니다.


 요즘 저는 수필의 매력에 푹 빠져있는데요. 저는 글에서 향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윤오영 작가의 수필들을 읽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저에게 글에 향을 담아낼 재주는 없지만 그런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넘쳐서 매회 글이 길어졌습니다. 지리멸렬하게 길기만 한 글을 계속 읽어주신 분들이 있어 즐겁게 썼습니다. 쓰고 보니 지나온 시간에서처럼 예상치 못한 어떤 만남들이 저에게 또 다른 길을 보여주리라는 즐거운 예감이 듭니다. 또 다른 만남들에 대해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이만 연재를 마치겠습니다.


누구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생활 속에서 생활을 알고, 생활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누구나 책을 보고 글을 읽지만 글 속에서 글을 알고 글을 말할 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다. 민노자(閔老子)의 차를 마시고 대뜸 그 향미와 기품이 다른 것을 알아낸 것은 오직 장대(張岱)뿐이다. 그는 낭차(낭茶)가 아니고 개차(개茶)인 것을 알았고 봄에 말린 것과 가을에 따 말린 것을 감별했고 끓인 물이 혜천(惠泉)의 물인 것까지 알아내어 주인을 놀라게 했다. ⋯⋯ 평범한 생활 속에서 향기를 거두고 품(品)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필이란 거기서 우러난 다향(茶香)이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진실을 깨치고, 그것을 아끼고 또 음미하고 기뻐하고, 눈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 즐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나 민옹과 장대는 아울러 드물다.

윤오영, 엽차와 인생과 수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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