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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Apr 02. 2024

함께 장애학을 읽는 사람들

 작년 3월 중순쯤 읽기의 집 ‘당장함께’ 모임에서 신규 회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습니다. 당장함께는 '당신과 장애학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의 준말로 2022년 7월부터 시작해 시작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모임이었습니다. 이번 시즌3에는 ‘철학: 장애는 철학자에게 복음인가 악몽인가’라는 주제로 장애를 다룬 철학책 두 권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해 3월은 제가 방통대 컴퓨터과학과 3학년에 편입해 막 첫 학기를 시작한 때였습니다. 방통대 편입은 제가 속한 프론트엔드 팀을 이끄는 리더분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프론트엔드라는 직군에서 주니어 때는 컴퓨터공학에 대한 기본 지식이 크게 필요치 않은 게 사실이지만, 경력이 쌓이고 시니어가 될수록 마주치게 되는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방통대 출신이시기도 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수업을 듣는데 어떤 점이 어려운지 알고 계셨고, 그래서 업무와 병행하는데 무리가 없도록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시려 했습니다. 

 컴퓨터공학에 대해 아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전에도 여러 시니어분들에게 들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라이브러리나 프레임워크를 버전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사용법을 습득하는 것 때문에 저의 흥미가 떨어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도구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프로그래밍에 대한 흥미가 다시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퇴근 후 한 과목씩 수업을 들으면 주말에 하루 정도는 쉴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당장함께 모임에 참여하게 되면 그 남는 하루에 장애학 책을 읽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쉬는 날에는 보통 읽고 싶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이용하면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만큼 꼭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장애학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순전 팬심이었습니다. 고병권 작가님이 고집사라는 닉네임으로 읽기의 집 운영자이자 당장함께 회원으로 활동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고작가님을 처음 알게 된 건 대학원 시절 학교 주변 평생학습관에서 들었던 <다이너마이트, 니체> 강의에서 입니다. 논문 학기 때 집에 가만히 있으면 덮쳐오는 우울함과 막막함이 무서워 집 주변 평생학습관 강의를 몇 개 신청했는데 그중 하나가 니체 강의였습니다. 불면증이 있어 수업 시간에는 대부분 졸았습니다. 이상하게 그 강의실에 앉아있으면 안심이 되면서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조는 와중에도 귀에 들려오는 강의 내용은 신선했습니다. 개구리의 퍼스펙티스,  다이너마이트의 핵심은 폭발이 아니라 응축에 있다, 당대 활시위를 그 뿌리까지 당기는 것, 우리 시대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시대로부터 가장 먼 곳을 겨냥하는 것과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퇴근 후에 도서관에 가서 고작가님의 책들을 한두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세상을 보는 저의 시선을 뒤집어버렸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삶을 긍정해보고 싶어 졌습니다. 삶에 절망했을 때 만났던 그 놀라운 경험이 지금의 저에겐 몹시 절실했습니다. 모임에 참여 신청 메일을 보낼 때 저에겐 그런 기대가 있었습니다.


 당장함께 모임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대학원 수업 같다.’였습니다. 매주 화요일 ZOOM을 통해 온라인으로 만났습니다. 모임에 참여한 회원들이 한 명씩 매주 돌아가며 발제문을 작성해 공유하고 나머지 회원들은 100쪽가량의 분량을 읽어옵니다. 모임 당일에는 30분 안팎으로 발제자가 준비해 온 발제문을 읽습니다. 발제가 끝나면 나머지 1시간 반 동안 각자 발제문에 나온 내용 또는 자신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점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모임 방식뿐만 아니라 글의 형식도 대학원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제가 모임에서 처음 같이 읽게 된 책은 <철학, 장애를 논하다>였습니다. 장애를 철학적으로 접근한 해외의 논문들을 번역해 묶은 책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읽는 논문은 역시나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장애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읽기에는 난해하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글들이었습니다.

 모임 회원들은 저와 같은 신규회원을 제외하고 모두 시즌1부터 꾸준히 참여하신 분들이었습니다. 모두 15명이나 되었으므로 시간관계상 첫날 새로 들어온 회원들만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첫 시간 모임에 참여한 소감은 이 분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분들이기에 장애의 의료적/사회적 모델이 가진 문제에 대해 이렇게나 할 말이 많은가였습니다. 2021년 12월 3일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시작된 출근길 지하철 탑승시위로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살벌하게 욕을 먹고 있던 때여서 그 반대의 이야기를 듣는 게 신선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제 기준으로 매주 읽어야 하는 분량을 읽으면 6-7시간 정도 걸럈습니다. 저에게 허락한 시간 내에서는 주어진 분량을 간신히 한 번 읽어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용어가 생소하고 학술적인 내용이라 글이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한 번 읽은 내용이 머릿속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될 리가 없었으므로 모임 때 읽은 내용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기란 저에겐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읽은 내용과 관련된 경험이라도 있으면 그걸 소재거리 삼아 보기라도 했을 텐데 저에게는 장애인을 만난 경험 자체가 희박했습니다. 첫 번째 책이 끝나기도 전에 모임에 들어온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텼던 건 순전히 나갈 타이밍을 못 잡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 버티자는 심정이었습니다. 2시간 동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 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제가 한마디도 안 하는 것이 신경 쓰이셨는지 어느 날 한 회원 분의 제안으로 모두가 한 번씩 돌아가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방식이 도입되었습니다.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겹치는 말을 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황스럽게도 제 머릿속은 다른 분이 하는 말이 조금만 길어져도 금세 딴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누군가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어야 할 때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의식적으로 집중하려고 해도 조절이 안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제 상태가 보이자 착잡해졌습니다.

 일을 할 때 저는 너무 많은 지식들을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정보는 언제나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초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하면 제 뇌는 저도 모르는 새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방식도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과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모든 일감은 같은 팀 내에서도 비동기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제가 전에 했던 작업에 대해 다른 팀원이 문의를 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답변을 해야 상대의 업무가 정체되지 않는 흐름이었습니다. 일을 하면서 답변을 빠르게 해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 하던 일에서 다른 주제의 일감으로 빠르게 전환하는 업무 방식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상대의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져도 조바심이 나는 일이 늘었습니다. 이런 일상의 반복이 다른 사람 말을 듣는 능력의 퇴화를 불러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임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420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 왔습니다. 회원들 사이에서 그날 시위가 있는 시청역에서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모임 회원들과 친해지면 그나마 이번 시즌을 버텨내는 게 덜 힘들지 않을까 싶어 반반차를 내고 시청역으로 향했습니다. 기대와 다르게 4월 20일 당일에는 읽기의 집 집사 두 분만 오셨습니다. 고집사님과 루집사님이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시위 참여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에서 루집사님이 음식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근처에 펼쳐진 돗자리에 앉았습니다. 루집사님은 신고 있던 크록스 신발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거침없이 날려버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범상치 않은 모습에 놀라며 저도 그 옆에 엉거주춤 앉았습니다. 첫 만남의 어색한 분위기도 깰 겸 ‘오늘 꽤 춥네요’라고 루집사님께 말을 건네보았습니다. 루집사님은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짓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는 예의상 맞장구를 치기 마련이라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루집사님은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무료 급식소에서 받은 김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함께 받은 고구마 말랭이를 내밀며 먹어보겠냐고 상냥하게 권했습니다. 방금 답을 안 한 건 제가 싫어서는 아니었구나 싶어 안심했습니다. 루집사님도 당장함께 시즌4에 함께하기로 했다고 마찬가지로 옆에 앉아계시던 고집사님이 알려주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시즌3부터 모임에 들어왔다, 중간에 들어와서 그런지 따라가기 힘들다고 운을 뗐습니다. 루집사님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은 묘한 표정이 떠올랐고 역시나 답이 없었습니다. 묻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막막했으므로 우선은 저 또한 침묵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루집사님의 식사가 끝나자 고집사님은 저에게 시위 현장을 한 번 둘러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따라 나서 한걸음 떼기가 무섭게 고집사님이 아는 분이 보였습니다. 마주치는 분마다  장애운동 쪽에서 유명한 활동가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날 뵈었던 활동가분들은 모두 장애 당사자였습니다. 장애운동과 연대하는 단체들의 길게 늘어진 깃발 주위를 누비며 저는 고집사님의 설명에 따라 열심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경찰과 장애인 분들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압도되어 있던 저는 소개를 받아도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되었지만 예의상 우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장애운동의 장구한 역사를 2배속으로 훑어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날 시위현장을 돌아다니며 가장 의문이 들었던 점은 왜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의 경찰이 이곳에 동원되어야만 하는가였습니다. 대체 저 전동휠체어에 앉은 장애인 분들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라고 이럴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찾아본 기사에는 그날 시위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2500명의 연대자가 참여했다고 나와있었습니다. 제가 혼자만의 삶에 갇혀있는 동안 세상의 한쪽에서는 이런 역사 만들어져가고 있었구나 싶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질문만 잔뜩 쌓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루집사님이 읽기의 집 네이버 카페에 남긴 글들을 검색하다 루집사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응 거부선언>의 작가 소개를 빌어와 그날 제가 접했던 루집사님의 이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본명 이하루. 전문 부랑자이자 히치하이커. 평생 일만 하며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달랑 500만 원을 들고 무작정 집을 떠나 2014년부터 방랑을 시작했다. 6년 동안 60개국을 돌아다녔으며 그 거리가 총 44,048km. 현재는 한국에 임시로 거주하며 동물해방을 위한 퀴어-아나키 예술활동가 공동체 플라가미의 대표이자 영화/음악 프로듀서, 래퍼, 영상기록활동가로서 여러 투쟁 현장에 연대하고 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충격이 가시자 그다음으로 왠지 모를 억울함이 뒤따랐습니다. '평생 일만 하며 사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겠다라니… 누구라도 평생 일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데... 아니, 대부분은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먹고살아야 하니까 하는 거 아닌가?' 누구에게 인지 모를 반발이 들었습니다. 

 하루 정도 지나자 평생 일을 해야만 하는 삶은 정말 당연한 걸까 하는 의문이 제 안에서 올라왔습니다. 질문에 답을 하려 하면 할수록 이 당연해 보이던 일이 정말 당연한가에 대해서 저는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나와 같이 일하는 시니어분들은 경력이 10년, 15년이 되었는데도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을 안고 살고 있는 것인지, 그러니까 왜 나의 회사 동료들은 하나같이 늙어서까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가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는 이어지던 질문은 결국 다시 익숙한 물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대체 왜 일을 하고 있는 걸까?


프로그래밍을 공부할 때 저 역시 해외취업도 해보고 싶고 디지털 노마드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컸지만 그 정도의 비용은 얻는 보상에 대비해 봤을 때 합리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어떤 직군보다 똑똑하게 일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저는 프로그래밍 공부가 괴롭고 흥미롭지 않을 때마다 제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하루님의 삶은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그런 비용이 필요하다는 믿음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장함께에서 함께 책을 읽는 경험은 근 3년간 제가 했던 경험과 다른 차원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프로그래밍과 관련 없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가면서 장애학에 대한 글을 읽는 것,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 개발자가 아닌 다른 직군의 사람들과 만나서 친해지려고 애쓰는 것 모두 제가 돈을 버는 일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비자본주의적인 일에 시간을 쏟는다는 감각은 저에게 불안과 동시에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생계와 상관없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제 자신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만족감은 결국 그동안 저에게 프로그래밍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반증이라 느껴졌습니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닌 프로그래밍은 내 삶에서 불가능한 걸까에 대해 생각을 시작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을 품고 제가 어떻게 웹접근성이란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다음 편에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가축으로 지정된 소, 돼지, 닭이 아닌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일하지 않기를, 집 없이 살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문득 가난과 고통의 기억, 여러 구금시설에서 머물렀던 시간, 여성으로 자라며 겪은 온갖 부당한 대우와 시선, 성 정체성의 혼란, 성폭력과 강간 피해 경험, 그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가 오히려 나의 고유한 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깥으로만 표출되던 분노의 에너지를 서서히 내면으로 돌려보았다. 나는 어떤–수많은–부당한 사회구조로 인한 피해 경험자로서, 관련된 문제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며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보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힘차고 담대하게 연대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나에게 주어져 있었다.
나는 이것을 ‘당사자의 경험권력’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리고 이 ‘특권’을 최대한 활용하여, 다른 누군가는 더 이상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찾아나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해방이자, 스스로를 위한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208-209쪽, 사회주의 거부선언, 이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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