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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r 19. 2024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걸 먹기로 했다

 저는 비건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고 나서 채 한 달도 안 되어 동물성 식품을 모두 끊고 비건 지향인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직장 동료들이나 비건 모임에 가서 하면 다들 놀라더군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래 표와 같이 채식을 실천하는 방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참고로 제가 갔던 비건모임에서 만난 분들은 페스코로 시작한 분들이 다수였던 기억이 납니다.

출처: 뉴스젤리 브렌드마케팅팀. 스펙트럼 넓히는 비거니즘, “고기 먹어도 괜찮아요”

 

 물론 저도 동물성 식품을 멀리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좋아했던 닭강정이라든지 치즈케이크, 녹차라떼가 몹시 당기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왔습니다. 많이들 말씀하시는 것처럼 입맛이 변하는 데는 3개월 정도가 필요하더군요. 이쯤 되면 어떤 강한 신념이 있었길래 그 유혹들을 견뎠나 싶으실 것도 같습니다. 아니, 저부터가 왜 비거니즘이 그렇게 쉽게 제 삶의 중심으로 쑥 들어올 수 있었나 궁금해집니다. 이 기회를 핑계로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분석은 오직 제가 만났던 채식인들을 표본으로 하기 때문에 편향이 있을 수 있음을 먼저 전제하겠습니다.


 제가 만난 분들이 채식을 시작하는 이유는 크게 건강, 환경, 동물권이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습니다. 우선 건강을 이유로 시작하신 분들 중에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암이나 중풍 등과 같은 병이었습니다. 체질상 안 맞아 중학생 때부터 스스로 채식을 선택하셨다는 분도 봤습니다. 이분들에 비하면 저는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에는 해당하진 않았으나 굳이 말한다면 체질상 안 맞았다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래 육고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회식 때를 제외하고는 고기를 찾아 먹지는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에서부터 신호가 오는 사람이 저였는데요. 한국인의 75%가 가졌다는 유당불내증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카페에 가면 저의 일 순위 메뉴는 매번 녹차라떼였습니다. 20대 중반에 노인성 치질 질환으로 수술 권유까지 받을 정도로 장 관련 기관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끊이질 않았던 방귀 관련 에피소드가 한 트럭은 됩니다.

 두 번째 유형인 환경. 제가 만난 분들 중 환경을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신 분들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비건 지향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진행하는 비건 관련 독서 모임을 찾아다녔습니다. 그게 2022년인데 환경 관련 도서를 다루는 모임이 대부분이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성 비염이 있고 코로 숨 쉴 수 있는 구멍이 평균치보다 작은 코를 가진 저는 환경 문제 중에서도 미세먼지에 상대적으로 예민한 편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환경 관련 활동을 할 정도까지 적극적이진 않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하려고 합니다.

 옥수수 치실을 사용하고, 샴푸바를 쓰고, 안 쓰는 전자제품의 플러그를 뽑고,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타는 일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기후재앙의 마지노선이라는 지구 온도상승폭 1.5도를 막는데 이런 저 개인의 노력이 큰 도움이 되진 않으리라는 체념도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비건을 지향하는 이유에 환경을 위해서라는 이유도 분명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저라는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환경 보호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고 있다 정도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 유형인 동물권. 이 단어를 들으면 뉴스에서 전염병 때문에 생매장되던 돼지들을 바라보던 과거의 제가 떠오릅니다. 포클레인 세 대 정도가 포위하듯 둘러싼 커다란 구덩이 안에서 꿈틀거리던 살덩이들을 보면 누구나 그렇듯이 저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생각하며 한편으론 냉정하게 바라보던 사람이 또한 저였습니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역시 모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겠습니다. 모모는 제가 중학생 때부터 같이 산 반려견입니다. 어떤 동물과 긴 세월 동안 관계를 맺고 사랑했던 경험. 이것만큼 제가 비거니즘에 강하게 끌리도록 만든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듯합니다.




 


 비건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당시 저는 1년 넘는 백수시절을 비로소 끝내고 바라던 대로 프론트엔드 엔지니어로서의 첫 1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CTO님과 저 포함 프론트엔드 2명인 개발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팀 내에서 React.js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어느 정도 수준의 개발팀이었는지 감이 오실 것 같습니다.

 70군데 넘는 곳에서 서류조차 통과하지 못하여 애간장을 태우다 들어간 회사였기 때문에 큰 기대가 있진 않았습니다. 대표님이 인간적으로 존경스러운 분이어서 나름 만족스러워하며 다녔습니다. 2개월이 지나고 고대하던 정규직 계약서를 쓸 때 대표님은 ‘지금 시대는 사람들이 너무 돈밖에 모른다.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하는 기업 문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믿고 듣진 않았습니다. 그런 이상적인 이야기를 별 표정변화 없이 담담하게 하시는 걸 신기해하며 서명을 했습니다.

 시간이 쌓여갈수록 상대를 존중하는 게 느껴지는 태도로 말단 사원인 저와 제 동기를 한결같이 대하는 모습을 보며 대표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의 물류센터에서 영업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는 대표님은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세월이 느껴질 만큼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서 베어나는 분이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똘똘 뭉쳐 1년 넘는 백수시절을 보냈던 저는 그런 어른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꽤나 정서적인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취준생 시절의 긴장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2시간 이상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안했습니다. 주말에 6시간 이상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 못한 날에는 죄책감에 허우적거렸습니다. 당시 사귀는 사람과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데이트하는 시간도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이 항상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취준 시기동안 부모님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시작한 연애였습니다. 만나는 상대가 나이가 많아 아버지에게 알리기는 고사하고 어머니 혼자 알면서 끙끙 앓으시며 저의 만남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매 데이트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제가 개발자로 나름 안착한 그 해에 모모의 건강은 최악을 향해 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원래 어려서부터 허리가 안 좋아 걷는 걸 싫어하긴 했지만 눈에 뿌연 안개가 끼는 것처럼 백내장이 오더니 하루종일 누워만 있었습니다. 제가 정규직 계약서에 사인한 지 3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예 먹지를 않게 되었습니다. 한 달 만에 수액을 맞지 않으면 생명을 연장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간호는 온전히 부모님의 몫이었습니다. 회사에 있는 시간에는 저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손 치더라도 주말에는 충분히 옆에 있어줄 수 있었겠지만 그러질 못했습니다. 집에 있는 게 숨 막히는 심정이었습니다. 엄마와 남자친구 문제로 불화가 심한 상태이기도 했지만 프로그래밍 공부를 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집에 있으면 항상 저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다 핑계입니다.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늙은 개의 곁을 지키는 일은 하고 싶은 게 넘쳐나는 저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막 삼십에 접어든 전 모모와 다르게 인생에서 활동적인 시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취업이라는 좁은 구멍을 통과해 개발 분야로 이직에 성공했던, 온통 제 인생 밖에 중요한 게 없는 그런 때였습니다.


 데이트하고 돌아오는 그렇고 그런 날들 중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모모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 돌아오는 도중에 마주쳤습니다. 그때 아버지의 품에 축 늘어져 있던 모모가 갑자기 앞발 하나를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했습니다. 저희는 깜짝 놀라 얘가 갑자기 어디가 아픈 건가 싶었습니다. 뒤늦게 모모가 저를 보고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만큼 제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던 적이 없었습니다.

 한 달 뒤 모모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모모가 떠난 날 저는 무엇에 화가 났는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하며 가족들에게 날카로운 말들을 쏟아부었습니다. 동물병원에서 소개했다던 장례 업체가 울고 있는 부모님에게 가격표를 내밀며 수의부터 시작해 유골함까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모습에 화를 냈습니다. 지방에 있는 동생이 혹시 급하게 운전하고 오다 사고나 나지 않을까 싶으니 연락하지 말라고 말렸던 부모님한테 뒤늦게 사실을 안 동생이 화가 나서 따지는 말을 편들며 싸움을 부추겼습니다. 언니가 왜 부모님한테 그러냐고 한소리 했을 때는 산책 한 번 데리고 나가지 않아 놓고 이제 와서 모모 생각하는 척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다 간신히 참았습니다.


 모모가 떠난 뒤 저에게는 자기 전에 유튜브에 ‘강아지’, ‘고양이’, ‘시고르 자브종’과 같은 단어를 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유튜브 추천 영상에 홍은전 작가님의 <처음부터 다시> 강연 영상이 떴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홍은전 작가님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가만 들어보니 똥 싸고 나서 식탁 위로 뛰어오른 고양이에게 내가 너같이 불결한 고양이하고는 같이 살 수 없다 소리쳤다는 일화를 말씀하시더라고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것 같아  계속 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 영상에서 저는 살면서 처음으로 비건이라든지 종돈장, DxE 이런 단어들을 만났습니다. 불을 끄고 라디오처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종돈장이란 곳에서 암퇘지가 몸을 180도로 돌리지 못한 채 평생을 갇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는 사실을 듣고 놀라긴 했으나 그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저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동물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가 굉장히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눈물은 그러니까 고통받는 돼지들의 참혹한 현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돼지의 삶은 당연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홍은전 작가님이 처음 카라라는 고양이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고양이가 자신을 물 때마다 방에 스스로를 가두며 읽어나갔다는 책들을 저도 한 권씩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프로그래밍이 주제가 아닌 책을 읽기는 그때가 어언 2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그 시작이 비건 입문서로 유명한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기를 먹지 않아도 영양학적으로 괜찮은 것인지가 가장 궁금했으므로 음식혁명(존 로빈스), 음식의 종말(토마스 폴릭), 다이어트 불변의 법칙(하비 다이아몬드),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존 맥두걸), 무엇을 먹을 것인가(콜린 캠빌, 토마스 캠빌) 등과 같은 류의 책을 읽었습니다.

 어느 비건 네이버 카페에서 발견한 게리 유프로스키의 강연 영상을 보고 공장식 축산업에 대한 심각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낙농업 노동자의 이유 없는 주먹질에 비명도 안 지르며 맞고 있는 송아지의 눈이 보였습니다.  그 눈은 제 기억 속 겁먹을 때 모모의 눈과 많이 닮아있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고 저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공장식 축산 시스템에 단돈 1원도 주지 않으리라 그런 비장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전에 저는 비건이라는 단어를 어디선가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작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근데 과거의 저에게 그 단어는 말 그대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대수롭지 않은 무엇이었습니다. 비거니즘을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매일 퇴근길에 지나치던 정육점 간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180도 뒤집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모와 함께 했던 16년이라는 시간들이 제 삶에 없었다면 매 맞는 송아지도 생매장당하는 돼지들처럼 생명이 아닌 하나의 상품으로 제 눈에 비쳤을 겁니다. 집에서 따뜻한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 앉아 있던 모모, 잘 때 다리나 옆구리 옆 이불을 온 힘을 다해 파내던 모모,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들 앞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꼭 오른쪽 방향으로만 빙빙 돌던 모모...

 저는 모모를 보면서 내 안에는 모모가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저도 따뜻한 곳에 몸을 누이면 기분이 좋습니다. 잘 때 편한 자세로 자고 싶어 잠자리에 누우면 이불을 이리저리 옮겨보곤 합니다. 가족들이 집으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구나 안도감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동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말이 저에게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던 것은 제 안에 모모가 느끼는 것과 같은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동물성'이라고 언어화할 수 있다는 걸 수나우라 테일러의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고 알았습니다.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동물성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208-209쪽, 짐을 끄는 짐승들, 수나우라 테일러


 첫 회사에서 10개월이 되어가던 때 현재 제가 다니는 회사에 인턴 채용 공고가 떴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주니어 때는 기회만 된다면 규모 있는 개발팀에서 일하는 것이 많은 걸 보고 배울 수 있어 좋다는 블로그글을 전에 읽어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조롭게 코딩테스트를 넘어 2번의 면접을 통과해 인턴으로 합격했습니다.

 인턴으로 입사한 날 우연히도 저의 비건 지향의 여정 또한 시작되었습니다. 인턴 기간과 수습 기간, 총 6개월이라는 긴 시기동안 제가 가진 개발자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는 시기에 한 달에 한 번씩 있던 고깃집 회식에 불참한다는 것은 저에게 선택지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비건 지향을 하면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사회생활의 벽에 부딪힌 부분부터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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