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태도

인과관계와 상관관계

by 장혁

사회적 의사결정뿐 아니라, 개인적인 의사결정에서도 통계적 사고방식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의사결정도 이렇게 들으면 어딘가 거창한 일인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삶의 방식이 바로 개인적 의사결정이다. 통계적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인의 삶에 방식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줄 수 있다.


우선 불확실성의 시대가 아닌 과거에 개인의 삶의 방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꽤 많은 시간을 돌려서 다시 신의 시대로 돌아가게 되면 개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세세한 일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모두 신에게 달려 있었다. 신이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약한 자, 가난한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신이 바라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해야 했기 때문에 신의 가르침에 맞춰, 혹은 신의 가르침을 전달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따르며 살아갔다. 신의 시대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언제나 신을 따랐다.


신의 시대가 저물어갈 무렵, 인간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때 개인의 삶의 방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신의 시대가 저물어간다고 해서 신의 존재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신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 이성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로는 그 '이성'을 따르는 삶의 방식이 생겨났다. 자신들의 이성이 만들어 낸 국가, 제도, 법이라는 틀에 맞춰서 살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에 맞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인간 이성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하게 되면 새로운 문제에 적합한 새로운 제도, 법과 같은 틀이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모든 문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에서 해결되었고, 새롭게 발생되는 문제 또한 그 틀 안에서 다뤄지게 되었다. 더 이상 인간이 스스로 해내지 못할 것이 없는 듯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그렇게 자신들의 합리성과 이성을 따르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해결할 것만 같았던 인간 이성도 결국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두 차례의 전쟁이 잇달아 이어지면서 역사는 인간 이성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신의 시대가 저물어갈 때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처럼 지금도 인간 이성은 개인의 의사결정,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한 축으로 남아있다. 물론 신도 남아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신이나 인간의 이성과 같은 하나의 절대적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 중 하나의 삶의 방식이 절대적일 수도 있지만 더 이상 그러한 사람들이 지배적이라거나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가지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 못해 방황하고 매 순간 고민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놓인 개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통계적 사고방식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삶의 방식을 결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통계적 사고방식에 결정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통계의 언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통계는 인과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주하는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상관관계가 대부분이며 인과관계라고 느끼는 것은 착각인 경우가 많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상관관계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개인의 삶의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행복한 삶으로 귀결된다. 입시에 성공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돈을 버는 일은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바랄 이유가 없다.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가령 앞에서 이야기했던 구체적인 목표들을 이뤄내지 못했을 때는 불행의 이유가 된다. 입시에 실패해서, 취업을 하지 못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꼭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왜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항상 어떤 이유가 떠오를 것이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과관계를 믿는 사고방식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행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원인이 있고, 결론이 있는 전형적인 인과론적 사고방식인 것이다. 인과관계의 사고방식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결정론적 사고방식과 이어진다. 나의 이유는 나의 결과를 결정하게 된다. 이들에게 자신이 불행한 이유는 이러한 원인 때문이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겪어본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불행의 원인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기쁨은 찾아오지만 일시적일 뿐 오히려 시간이 지나게 되면 내가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 허상처럼 느껴진다. 다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이유가 생기고 이 과정은 반복된다.


통계적인 사고방식은 인과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이러한 굴레를 끊어버린다. 개인의 삶은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특히 개인의 삶에서 대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관계,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인데 인간관계의 문제는 전혀 인과적이지 않다. 인과관계는 자연 속에서는 찾아낼 수 있지만 사람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인과관계를 부정한다는 것이 그들 사건의 영향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통계적 사고방식에서는 이들 사건의 영향력을 상관관계로서 이야기한다. 입시, 취업, 돈,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패하는 것은 불행과의 상관관계가 있다. 불행해서 그렇게 된 것인지, 그래서 지금 불행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건이 불행할 가능성을 높인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관계에서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연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건이 불행할 가능성을 키울 수는 있어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없다. 끝에 가서 불행을 택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이야기한다. 통계적 사고방식은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상관관계로 그들의 영향력을 제한함으로써 최후의 순간에 우리에게 선택지를 제공한다.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사건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물론 내 삶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끝에서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삶의 끝에, 골키퍼 역할을 그들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물론 지금 당장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모르제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나의 불행이 당연히 그들 원인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불행의 원인에서 나는 빠지게 된다. 마치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상관관계만을 제시할 뿐, 결과적으로 불행을 선택한 것은 자신이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불행한 것도 억울한데 그 결과를 만들어낸 것 또한 나 자신이라고 하니 더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삶은 정말 그렇다. 불행하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할 사람들은 없겠지만, 항구적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행복이나 불행과 같은 결과를 그들이 결정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영향력을 상관관계로 제한해야 한다. 삶이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야 하지만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누군가는 행복으로 치환하고 누군가는 불행으로 치환한다. 나쁜 일을 누군가는 상관관계라고만 느끼고, 누군가는 인과관계라고 느끼는 것이다. 통계적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상관관계를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심리학과 닮은 면이 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맞다.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결국 심리학과 맞닿아 있다. 우리 마음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선 시대를 대표하는 방식, 결정론적이고,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닮아 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깔려 있는 트라우마적 기제가 바로 인과관계의 원인을 이야기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문제를 겪는 사람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트라우마라는 기제에 의해서 그래야만 하는 결과가 이어지는 것이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 불행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잘 들어주는 것, 그리고 그 원인이 당신 탓이 아니라는 위로이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 자신의 원인, 트라우마를 이겨내도록 돕는다. 하지만 인과관계는 그 자체로 너무나 강력하다. 인과관계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개인이 깨트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사고방식은 아들러의 심리학과 닮아 있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자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보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통해 알려진 것이 더 크다. 이 책에서 아들러의 심리학은 인과관계를 부정한다. 원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경험이 물론 존재하지만 그 원인에 '이것이 내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의미를 스스로 떼어내라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니 행복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는 한 가지 옳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존재한다. 그러니 개인의 삶에서도 당연한 것은 없다. 통계적 사고방식은 불확실성 하에서는 당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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