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에너지! 보건샘을 춤추게 하다!
보건실은 쉬는 시간을 제외하곤 다른 학교 공간에 비해 조용하고 고요하다.
특히 고등학교 보건실은 문을 벌컥 여는 사람보다
조심스레 손잡이를 돌리며 눈치 보는 사람이 더 많다.
눈물 훔치는 아이, 민원에 시달려서 마음이 힘든 선생님,
그리고 ‘또 허리야...’ 하며 침대에 눕는 단골 학생까지...
내가 응급실에서 근무할 땐 목청이 정말 우렁 찼었는데,
보건실에 근무하면서 부터는 나도 덩달아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보건실에서 조용히 걷는 법까지 터득한 걸 보니,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참 오래 된 것 같기도 하다.
목소리나 움직임만 차분해진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 일도 예전보다 점점 줄어들었다.
보건실에서는 누군가의 힘든 감정에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때때로 공감이 과해지면 감정 전이를 불러오기도 하고,
학생의 정서적 의존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조심스럽게 다루기 시작했고, 점점 덜 드러내게 되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점심시간.
보건실 옆마당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는 학교 밴드가 여럿 있는데,
점심시간이나 축제 주간이 되면 서로 돌아가며 버스킹 공연을 연다.
처음 고등학교에 발령받았을 때는 아이들이 밴드를 구성해
자발적으로 무대에 서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귀엽게 느껴져서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밖으로 나가 눈을 반짝이며 지켜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자, 창밖으로 들려오는 음악은 일상의 배경음악이 되었고,
나는 노래 소리를 들으며 공문을 정리하거나 보건일지를 입력하는 등 내 업무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버스킹 공연의 노래를 같이 흥얼 거리면서 공문을 작성하고 있는데,
이게 웬걸. ‘담배가게 아가씨’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요즘 애들이 이 노래를 안다구?”
반가운 마음에 나는 어느새 보건실 문을 확 열고 뛰쳐나갔다.
버스킹 무대 위에는 기타를 양손으로 능숙하게 퉁기며 리듬을 이끄는 아이,
전자키보드를 세밀하게 두드리며 멜로디를 살리는 아이,
온몸을 들썩이며 드럼을 두드리는 아이,
그리고 무대 위를 종횡무진 누비며 시원하게 고음을 뽑아내는 보컬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오래 함께한 밴드처럼 호흡이 척척 맞았고,
'담배가게 아가씨'의 경쾌한 리듬은 온 학교를 들썩이게 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학생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는데,
나도 즐거운 마음에 손뼉을 치며 같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순간 보건실 단골 학생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는
“오!! 보건쌤 춤 잘 추시네요!!” 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주변 아이들도 웃으며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손을 흔들고, 누군가는 박수를 쳤다.
순간 나는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왠지 창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지고, 환호가 오가는 그 순간이 꽤 뭉클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내가 춤을 췄다고?
노래에 맞춰서 손뼉을 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얼쑤얼쑤 춤처럼 발도 구르고,
무릎도 굽혔다 펴면서 리듬을 탄 모양이다.
그날의 햇살은 눈부시게 쏟아졌고, 바람은 초여름 풀내음을 실어 나르며 뺨을 간질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기타 소리에 실린 열정적인 고음까지.
모든 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나는 그 순간, 마치 오래된 필름 속 한 장면처럼,
이 싱그럽고 아름다운 오후의 한때를 온몸으로 들이마시고 있었다.
보건실 안에서는 늘 '침착한 어른' 코스프레를 한다.
아이가 울면 “아이고 많이 힘들었구나”를 외치며, 아이와 함께 무너지는 내 마음을 숨긴다.
선생님이 초조하게 찾아오면 “이쪽으로 와서 잠시 누워서 쉬세요”를 외치며
속으론 걱정스런 마음에 더 초조해진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싱그러운 아이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쳤고,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고, 박자를 타며 발을 굴렀다.
그 순간, 주변의 시선이나 역할 따위는 잠시 내려놓고 오롯이 내 감정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평소엔 보건실 커튼처럼 감정을 반쯤 가려놓은 채 하루를 보내지만,
이 아이들의 화사한 표정과 끝없이 솟는 에너지에 휘말리다 보면 나도 살짝 커튼을 걷고 싶어진다.
아니, 오늘만큼은 마음껏 웃어도 되지 않을까?
너희들과 함께 즐기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들의 생기 발랄한 에너지, 그 명랑한 소란은 나에게 그 어떤 영양제보다 강력하고,
내 안의 감정들을 따스하게 흔들어 깨우는 명약이다.
아! 보건교사 하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