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력의 기본형

시속 4km로 탐색하는 세상의 레이어

by 굴히

편력遍歷 [펼력]

1. 이곳저곳을 널리 돌아다님.

2. 여러 가지 경험을 함.



편력의 기본형은 걷기다.


한 발 한 발 번갈아가며 땅을 딛고 다시 밀어내는 동작의 반복. 발 아치를 땅의 요철에 포개어본다. 내 몸무게를 지탱하는 발바닥과 이곳의 사람됨을 떠받치는 땅이 마주 본다. 우묵하고 볼록한 표면이 만나는 피부를 통해 새로운 풍토와의 상호 신원 확인이 내게 허락된 속도로 찬찬히, 그리고 단단하게 이루어진다. 존재가 살그마니 실뿌리를 내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구에서 이 정도 무게를 차지하고 있고요, 이런 리듬으로 걷고 살아가요.



현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창업역량강화 캠프의 일원으로 르완다 키갈리에 다녀온 일이 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바쁘게 짜인 일정에 호텔과 캠프가 진행되던 학교 정도를 키갈리의 전부로 알고 사흘을 지냈다. 슬슬 여기가 아프리카인지 한국의 연수원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때쯤, 캠퍼스 바깥으로 나가볼 핑계를 얻었다. 학교 정문에 걸어둔 캠프 현수막 사진을 찍어야 했던 덕분이다.


현수막이 걸린 방향에서는 원하는 구도가 나오지 않아 정문 반대편으로 넘어가 보기로 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넌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고개. 그제야 르완다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아보카도와 커피, 아침을 깨우는 목청 좋고 커다란 새들보다 훨씬 선연한 확신으로.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갔다 돌아오는 정도의 거리만으로도 낯선 땅과 충분히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니 땅에 직접 발 디딘다는 감각은 얼마나 중요한가.


한 땅을 구성하는 사람과 가게, 거리의 모습을 느릿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제하고 어떻게 그곳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을까. 강물처럼 흐르는 도시의 전경을 관망할 수 있는 버스나 자동차도 매력적이지만, 알아감에 있어 걷기를 대체하기는 영 아쉽다. 매 문장을 단어 단위로 음미하며 읽어야 할 책을 훑어 넘기는 것처럼.


엔진 달린 현대 이동 수단의 속도는 본래 인간 단신으로는 도달 불가한 속도이지 않은가. 신체의 한계를 우습게 넘어서는 속도로 달리는 차량 안으로 들이치는 시청각, 감각의 데이터는 때로 즉각 처리해 내기에는 과한 정보량이라고 느낀다. 직전의 데이터를 처리하기 전에 다음, 또 다음 하며 들이밀어지는 풍경의 질주는 감탄보다는 압도일 때도 있고. 소화하지 못한 장면은 내 몸이 되지 못하니 그저 배설되고 만다.


비행기를 타거나 기차를 타는 식의 갑작스러운 이동 후에는 위치의 연속성에 구멍이 난 것만 같다. 인식의 위치가 몸의 위치를 따라오지 못할 때, 지금 선 곳에서 '현재'가 일어나고 있음을 인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그곳의 땅을 느껴보는 일이다. 사람의 속도로. 내 몸의 자연스러운 속도로. 이곳이 목도한 모든 역사서의 일과 일기의 일에 무대가 된 땅을 쓰다듬으면서.



세 계절을 집이라 부른 마드리드

유럽에 머물며 여행하는 동안에는 하루 평균 삼만 보를 걸었다. 홀로된 발소리에 가만하게 내려앉는 사위. 고요를 파고든 곳에서 수 세기 전 이 거리의 타일을 먼저 밟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기도와도 같은 발자국들. 손을 잡아오는 과거. 걸음마다 하나의 질문이, 그렇게 삼만 번의 문답이 오갔다. 친절은 어디서 오나요. 그 단어는 언제 당신을 찾아왔나요. 당신은 이 광경 너머로 무얼 보았나요. 아름다운 건 왜 아름답지요. 사랑은 또 뭐예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영영 닫힐 수 없는 질문을 품었으므로 감히 영원이라 부를 날들.


골몰할 질문이 이어지는 곳까지, 이것이며 저것이며 궁금한 것들이 뻗는 곳까지 삶이라 해도 좋으리라.


세 개째 여권을 사용하는 동안, 길들이겠노라 결심하고 도착한 항구에 정박하는 일이 생각만큼 만만치 않을 때도 있었다. 노호하는 폭풍우, 삼키려는 파도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도 다리에 힘을 꼭 주고 걸었다. 두 발이 닻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걸으면 주변도 시속 4km로 함께 잦아들었다. 중심이 안정되니 탐험해야 할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걸으며 세상이 한 덩어리가 아님을 발견했다. 겹겹이 꼭 쥔 주먹에 비밀을 품은 작약의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메아리가 된 질문들만큼이나 복잡하고 아름다운 레이어의 겹침으로 된 세상. 깊이 뛰어들 용기만 있으면 도보 거리에서 무엇이든 만날 수 있다. 그 용기는 풍차를 향해 돌진한 편력 기사 돈 키호테에게 빌려 오기로 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