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지나 느리게 흐르던 그 열차에서
20대의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어릴 땐 과학자가 될 줄 알았고,
마음만 먹으면 서울대쯤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크게 애쓰지 않아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줄만 알았다.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유행처럼 번지던 무렵,
나도 조금은 멀리 떠나
일하면서, 여행도 하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청춘이고 자유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안 돼.”
그 시절엔 해외여행이 지금만큼 익숙하지는 않았다.
일주일 이상 서울을 벗어나 본 적 없는 내가
혼자 호주로 간다는 건,
보수적이었던 부모님 입장에선 막막한 일이었을 것이다.
설득이 필요했다.
워킹홀리데이가 아니라면
여행이라도 떠나리!!
포기할 수 없던 마음이 또 다른 길을 찾았다.
호주 관광청에서 내건 공모전.
여행 코스를 제안하면 호주를 일주일 정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조건 간다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지금처럼 인터넷 정보가 쏟아지던 시대는 아니어서,
하루하루 책을 파고, 자료를 모으고, 계획을 짰다.
자신감 넘치게 애정 가득 담아 준비한 공모전이었다.
제출 직전, 파일이 업로드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걸 준비한 탓일까.
끝내 내가 준비한 자료의 업로드는 안되었고, 응모조차 못한 채 모든 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망한 입시에도, 엉망인 성적에도 무심했던 나였는데..
처음 느껴본 엄청난 좌절감이었다.
인생은 언제든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겼다. 이번엔 ‘호주 왕복 항공권’이 걸린 새로운 공모전.
이미 보름 여간 공부를 해 온 덕에 마음의 준비는 되어있었다.
너무 많은 걸 담기보다 진심 하나만은 꼭 전하고자 했다.
그리고, 1등.
이게 .............. 되네?
두 달 반
호주 배낭여행
내가 보여준 노력의 결실을 아셨는지
부모님은 그 어떤 반대도 없이, 허락을 하셨다.
배낭 하나와 캐리어 하나를 들고
나는 호주로 떠났다.
즐겁고, 설레고, 외롭고, 어쩐지 울컥했던 밤들.
두 달 반의 시간, 내 마음을 일기로 써 내려갔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아 엄마의 걱정이었던 나인데, 여행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여행 막바지가 되어서야 지독한 몸살을 알았는데,
서울로 떠나야 하는 때가 오니
모든 긴장이 풀렸던 것 같다.
알아보지 못할 지렁이 같은 글씨로
아픈 와중에도 일기를 쓴 걸 보면
누구에게 보이려는 글이 아니라,
그날의 나를 잊지 않기 위한 마음이 간절했구나 싶었다.
내 인생 첫 기록의 시간이었다.
마지막 여정,
3박 4일의 횡단열차
실패로 끝났던 첫 공모전에서 그려냈던 도시, 퍼스.
그리고 나를 이 여정으로 이끈 항공권의 시작, 울룰루.
(공모전 당선이 울룰루와 관련 있었다)
배낭여행 막바지,
울룰루와 퍼스는 꼭 닿고 싶은 지점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여행지 퍼스를 거쳐,
시드니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퍼스와 시드니를 잇는 3박 4일의 대륙 횡단열차.
비행기보다 훨씬 느린 이 여정은
창밖의 황량한 사막을 벗 삼아
내 여행의 마지막 장을 천천히 넘기고 있었다.
그 열차 안, 내 옆자리에는 동갑내기 한국인 친구가 앉아 있었다.
우리는 사막 위를 가로지르는 새벽 기차에서 마주 앉아
긴 호흡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기차가 하루를 넘어 이틀을 지날 무렵, 그 친구는 한 권의 책을 내게 건넸다.
앞표지 안쪽엔 작은 손글씨 편지가 담겨 있었고,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여행이 끝난 후의 시간을 상상해 보았다.
"이 여행, 꼭 글로 남길 거야."
그날 밤, 처음으로 그런 말을 꺼냈다.
우리는 시드니 기차역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현지에서 쓰던 내 핸드폰은 고장이 나버렸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다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그렇게 어긋났다.
사람들은 한 번쯤 《비포 선라이즈》 같은 영화 속 이야기를 꿈꾸곤 한다.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멋스럽지도 않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몇박 몇일의 기차안에서의 우연히 마주한 만남, 서로를 응원하던 내 청춘시절의 잔잔한 여운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낭만으로 남아 있다.
호주 여행기
추억을 남기다
시간이 흘러,
나는 호주 여행기를 온라인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꽤 많은 이들이 내 이야기를 구독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겨진 하나의 댓글
“정말로 글을 쓰고 있네.”
그 짧은 문장이 멀리서 들려오는 응원처럼 마음을 울렸다.
우리는 그렇게 그 밤의 다짐을 응원해 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밤의 다짐을 따라 시작한 연재는,
플랫폼의 종료와 함께 조용히 멈춰버렸었다.
기억 저편으로 흘려보냈던 장면들이
이 글을 쓰며 다시 또렷해졌다.
끝맺지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나의 글쓰기가 시작되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