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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지원을 한 곳의 대표가 서류발표가 나기도 전에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한 날, 나는 내가 다니게 될 직장의 풍경을 처음 마주했다. 겉은 아주 멀쩡했다. 심지어 오가는 길에 자주 봤고, 대로변에 위치해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도 적절했다. 그날 나도 모르게 모의 출근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사전에 오는 연락을 좋은 시그널로 해석한 것이다.
입사 후 팀원들을 통해 들은 후일담으론, 인사에 대한 불안이 높았던 대표는 서류를 믿지 못했고 마음에 점찍은 후보 몇 명은 이런 식으로 불러서 얼굴을 보곤 했다고 한다. 사실 대표에게는 인사권 이랄것도 없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면접 놀이를 한 게 아닌가 싶다.
88년생 팀장 실패기. 오늘은 첫 출근 이후 펼쳐지는 인수인계, 그 시작이 얼마나 불안정했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코로나의 서막, 시기도 어중간한 2020년 4월의 어느 날. 나는 어쨌든 그렇게 팀장이 되었다. 첫 출근날 어색하게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대표와도 짧게 인사를 나눴다. 내 자리는 사무실 제일 끝 벽 쪽이었고, 대표는 나와 반대쪽 제일 안쪽에 작은 방에서 근무를 했다. 그 사이에 4명의 팀원이 앉아있는 지극히 평범한 구조의 사무실이었다.
여기까지, 뭔가 이상한 것이 있는데,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원래 있던 팀장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무슨 사정이 있거나, 이직을 했거나 하더라도 인수인계 서류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취업을 했단 사실에 상기되어 중요한 걸 캐치하지 못한 것이다. 이전 팀장의 이러한 뒷모습이, 나의 뒷모습이 될 수도 있었단 수미상관의 법칙 말이다.
대충, 시설 라운딩을 끝내고 텅 빈 내 자리에 앉았다. '일머리가 없는 사람은 아니니, 작년 돌아간 사정을 파악하고 나면 올해 업무를 대략 따라갈 수 있겠지?' 라며 태연한 얼굴로 일단 컴퓨터를 켜려는데,
'어? 이게 뭐지?'
그는 왜 슬리퍼 마저 내팽개치고 그렇게 떠났을까.
'이 신발을 다시 찾으러 올까?' 그러기엔 너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벗어던지고 나간 모양새인데.
'버릴까?' 어느 날 그가 슬리퍼를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때 딱 적당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신고 있다가 달라고 하면 주면 되지 뭐...'
대충 발 사이즈도 맞아 보였던 그 슬리퍼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신고 다녔다. 그 이후로 나는 이전 팀장과 전화나 카톡을 나눠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팀원들과는 종종 연락을 취하는 듯해 보였지만 사실 그의 도움 없이도 일은 일대로 굴러갔다. 그리고 그 실리퍼는 내 슬리퍼가 되었다.
나는 퇴사를 하면 그게 나에게 좋은 퇴사건, 아픈 퇴사건 떠난 자리에 들어올 사람을 생각한다. 나는 전임자가 슬쩍 미뤄뒀던 티 나지 않은 일들을 묵묵히 대신 처리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치사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 정도 행동은, 아무리 다녔던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또 미운 사람이 있더라도 나와 비슷한 수고를 겪게 될 다음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예의도 말이다. 웬만큼 마음이 괜찮아야 차릴 수 있는 거다. 그가 내팽개치고 간 건 슬리퍼뿐만이 아니었다. 업무내용과 함께 뭔가 복잡 다난한 일들이 휘갈겨져 있던 업무용 다이어리도 그대로 두고 갔다. 연초 해야 할 일들은 얼추 해놨던데, 뭐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가야만 했을까?
그땐 알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그 슬리퍼는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도무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혼자 감당했을 그 자리,
망가져 가는 마음으로 퇴사를 하게 됐던 그 자리,
처음엔 그도 그렇진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