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 정화는 "정화"가 아니라 "관조"다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나?
"누구는 감정을 가만히 보면서 수용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감당 안 되는 감정은 회피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 말을 따라야 하나요?"
정말 여러 번 강조했지만 감정은 정답이 없다. 감정을 느끼는 세 가지 방법은 회피, 직면, 관조다.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이 바로 직면이다. 감정을 직면했는데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면 대부분 바로 회피를 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은 감정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고 나서 수용하라고 한다.
그래서 나쁜 감정을 계속 직면을 했더니 수용은 되지 않고 그 감정에 계속 더 빠져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명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그 감정은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 빠져들게 되어 있다.
수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감정을 직면하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아끼는 장난감이 망가진 슬픔을 최대한 깊게 느껴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냥 하루종일 울 것이다.
이 어린아이가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 명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 감정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감정을 관조한다는 것은 그 감정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다.
무의식 정화는 왜 하는가?
유튜브 구독자 중에 한 분이 무의식 정화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는데 나는 무의식 정화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무의식 정화를 찾아보니까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무의식 정화라는 것을 알았다.
한마디로 무의식 정화가 뭔지도 모르고 나는 그냥 무의식 정화를 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 정화"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들 조차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사용하는 것 같다.
무의식 정화라는 것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좋지 않으니 이 감정을 정화해서 좋게 만들어야지"
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무의식 정화는 감정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 정화는 관조를 통해 감정을 분별없이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떤 감정도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다.
무의식 정화는 무의식 관조에 가깝다. 정화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무의식을 정화 대상으로 느끼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정화 대상이 아니다.
무의식이 깨끗한 사람과 지저분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과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은 감정을 회피를 하면 그 감정이 다시 일어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과연 감정을 관조하면 그 감정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인간의 감정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 정화를 거치고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저는 무의식 정화를 통해 감정을 정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이 계속 다시 올라와요."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감정은 원래 다시 올라온다.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감정을 제거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집에 강도가 들어 트라우마가 생겼는데, 수년간 노력해서 이 감정을 무의식 정화한다고 해서 다음에 강도가 침입했을 때 과연 평온할까?
발표 트라우마가 있는 내가 과연 무의식 정화를 한다고 해서 과연 그 긴장이 사라질까?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똑같은 감정은 다시 올라온다. 발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냥 긴장감이 올라오는 것이다.
무의식 정화를 거치고 나면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긴장하는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두렵거나 긴장하는 감정을 올라오지 않게 하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감정을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이 감정은 올라오면 안 된다"
라는 생각 자체가 회피고, 그러한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관조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무의식 정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나쁘게 보지 않으려고 무의식 정화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발표할 때마다 떨지 않는 것이 무의식 정화가 아니라, 발표할 때마다 떠는 내 모습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무의식 정화다.
무의식 정화의 첫 단주는 관조다.
무의식 정화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의 감정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나쁜 감정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의식 정화를 시도한다.
이러한 생각으로 무의식 정화를 하는 사람들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상태로 무의식 정화를 한다고 보는 게 맞다.
무의식 정화가 "정화"라는 단어를 쓰다 보니 나쁜 감정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순간순간 올라오는 나쁜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목적으로 무의식 정화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나쁜 감정은 없애려면 무의식 정화보다 회피가 훨씬 빠르다.
당장 자신에게 급속도로 달려오는 트럭을 몸으로 막는 게 나을까? 피하는 게 나을까?
그리고 무의식 정화를 한다고 과연 트럭이 더 이상 달려들지 않을까?
무의식 정화는 달려드는 트럭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트럭에 치여도 자신은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가깝다.
나쁜 감정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무의식 정화를 해도 아마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에고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쁜 감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나쁜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나쁜 팀장을 사라지게 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내가 부서를 옮기거나 그 팀장이 다른 부서로 가면 해결이 된다.
그런데 내가 부서를 옮기거나 그 팀장이 다른 부서로 간다고 해서 새로 만난 팀장이 좋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결과적으로 나쁜 팀장을 만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지금 팀장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다.
두려움은 나쁜 감정, 슬픔은 나쁜 감정, 화는 나쁜 감정, 긴장은 나쁜 감정, 쾌락은 나쁜 감정
이 모든 나쁜 감정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는 나를 "에고"라고 부른다.
감정은 분별에 의해 생긴다. 분별이 없으면 감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참 자아는 분별하지 않는다. 침 자아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참 자아는 분별하는 에고를 통해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참 자아는 감정을 느끼는 에고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고가 사라져야 참 자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를 관조하는 상태를 참 자아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사라지지 않듯이 우리의 에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을 정화한다고 감정이 제거되지 않는다.
무의식 정화는 감정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니라 감정을 관조하는 과정이다.
무의식 정화를 통해서
"나는 나쁜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겠다"
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정화를 통해
"나쁜 감정을 느끼는 나를 더 이상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
가 맞는 것이다.
희로애락 중에 희와 락만 있어야 행복하다면 인간은 영원히 행복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두려움을 느끼는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
"우울함에 빠져있는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
'슬픔에 빠져있는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겠다."
이렇게 분별이 사라진 상태가 바로 관조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 정화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모든 감정을 관조할 수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모든 감정을 관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든 감정을 관조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그리고 감정 또한 그 크기가 다 다르다.
자식이 넘어져 다쳐서 슬픈 것과 자식이 죽어서 슬픈 것은 과연 같을까?
자식이 죽어서 슬픈 사람에게 그 슬픔을 끝까지 들여다보라고 말하면 따라 죽을 가능성이 높다.
우울증에 빠져서 죽고 싶은 사람에게 그 우울함을 끝까지 들여다보라고 말하면 그냥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수영한 지 한 달도 안 된 수린이에게 잠영을 시키면 몇 미터 가지도 못하고 튀어나온다. 근데 튀어나오면 잠영을 할 수 없다고 수영 코치가 튀어나올 때마다 그 수린이 머리를 누르면 익사하게 된다.
명상도 별로 한 적 없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들려다 본 적 없는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그 상황을 계속 떠올리게 만들면 그 감정에 매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바퀴벌레를 극혐 하는 사람을 고치겠다고 방에다 가둔 다음에 바퀴벌레 100마리를 풀어서 문을 잠그면 과연 그 사람이 바퀴벌레에 적응을 할까?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 상황을 끝까지 들여다본다고 빚에 시달리지 않을까?
갑자기 회사에서 퇴사 통보를 받은 가장에게 회사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면 과연 그 사람이 회사를 좋게 생각할까?
자신의 상황과 감정의 상태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하면 그 감정은 절대 수용되지 않는다.
타인에게 맞는 방법은 나에게 맞는 방법이 아니다.
상황이 다르면 해결방법도 다르다
똑같은 상황인데 한 사람에게는 참으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참지 말라고 한다.
참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격이 욱해서 잘못하면 크게 사고를 칠 것 같아 참으라고 하는 거고,
참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매번 소심해서 당하기만 하기 때문에 참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말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사람마다 해결방법이 다르다. 한 가지 방법으로 모든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맞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어느 정도 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관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고, 마음공부가 전혀 되어있지 않고, 살면서 명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회피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호흡도 제대로 못하는 수린이에게 잠영을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수린이에게 잠영을 시키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수영장에서 잠영을 몇 번 해봤다고 계곡에서 혼자 잠영을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잠영은 수영장에서 안전 요원이 있는 상태로 하는 것이 맞다. 숙련된 해녀들도 파도가 심하게 치는 바다에 혼자 나가지 않는다.
안전요원 없이 혼자 잠영을 하는 것이나 감정이 미친 듯이 치밀어 오를 때 무의식 정화를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무의식 정화는 당장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종료되고 감정이 어느 정도 진정 되고 나서 명상 상태로 서서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무의식 정화는 실시간으로 되지 않는다.
팀장에게 엄청 깨지는 상황에서 부당하다는 감정이 계속 치밀어 오르는데 그 부당한 감정을 즉시 무의식 정화를 해보겠다고 계속 쳐다보면 그 부당하다는 감정은 엄청나게 커진다.
이때는 그냥 노이즈 켄서링이 답인 것이다. 팀장의 말이 왼쪽 귀로 들어가서 급속도로 오른쪽 귀로 나가야 그 감정이 처리가 된다. 이 상황에서는 회피가 답이다.
팀장이 실시간으로 깨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신의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달려드는 트럭에 뛰어드는 것이다.
무의식 정화는 그 상황이 종료되고 집에 와서 조용히 명상과 사색을 통해 그 상황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관조하고 수용하면서 하는 것이다.
당장 올라오는 감정을 실시간으로 정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간은 정수기가 아니다.
무의식 정화는 명상이라는 필터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이걸 명상을 통하지 않고 그냥 쳐다보는 건 구정물을 필터 없이 그냥 다른 그릇에 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담는 그릇이 달라진다고 물이 깨끗해지지 않는다.
단순하게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 정화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첫째 감정은 정답이 없다. 그 상황에 맞는 답이 정답이다.
둘째 무의식 정화는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무의식 정화를 하려면 당연히 마음 챙김이나 명상이라는 필터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 그것이 나쁘게 느끼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여러분의 마음공부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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