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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디자인한 엽서를 인쇄해보기로 함

손에 직접 쥐어보는 것의 힘


  포토샵을 배우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는 계속 그래픽 디자인만 해왔다. 디자인의 완성물은 컴퓨터 화면 속에서만 (또는 핸드폰 화면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예쁜 콜라주를 만들어냈다고(물론 선생님의 수많은 피드백을 받은 결과이지만)! 그렇지만 뭔가 공허했다. 내가 공부해 온 것들이 컴퓨터 폴더 안에만 쌓여가는 기분? 이러다간 매너리즘이 오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내가 덕질하고 있는 드라마의 오프라인 행사(팬들이 주최하는 행사였음)가 곧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덕질하는 드라마의 경우(다른 덕질 판에서는 어떨지 모름), 오프라인 행사가 열리면 행사 장소(보통 카페) 한 구석에 '나눔 존'이란 것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나눔할 물건들을 가져간 사람들이 그 '나눔 존'에 놓아두면, 나눔받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져가는 방식으로 나눔이 진행되었다. 나눔하는 대상은 워낙 다양했다. 배우들 사진이 담긴 포토카드, 엽서, 키링, 아크릴장식물부터 간식들까지. 나눔 존에 대한 공지를 보다, 갑자기 나도 나눔이란 것을 해 보고 싶다는 열정에 휘말렸다. 마침 나에게는 포토샵이라는 훌륭한 기술(?)이 있지 않은가! 


  포토샵 선생님께 이러한 계획과 결연한 각오를 말씀드리니, 선생님도 엄청 좋아하셨다. 기존 수업시간에 만들었던 팬아트(드라마 메이킹 컷으로 만든 엽서)를 엽서로 인쇄하기로 했는데, 인쇄가 잘 되는 색으로 보정도 손수 해주셨다. 인쇄 사이트에서 엽서로 쓰기 적절한 종이 종류도 골라 주셨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평소 포토샵 수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화면으로 보면서 보정하고, PDF파일로 추출해서 인쇄를 맡기는 사이트에 업로드했다. 내가 디자인한 엽서를 실제로 인쇄했다는 실감은 아직 들지 않았다. 




  며칠 뒤 회사에서 고난의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여기저기 부딪히며 매우 낡아버린 택배 하나가 집 앞에 놓여 있었다. 택배 박스에는 무려 내가 인쇄 신청한 그림이 인쇄되어 붙어 있었다!(아니 인쇄소 사장님 제가 뭘 인쇄할 줄 알고 이리 당당하게ㅎㅎ) 조심스럽게 택배를 열어보니, 곱게 인쇄된 엽서 수십 장이 들어 있었다. 

  그때의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정말 이상했다. 그동안 화면으로만 보던 내 디자인이 도톰한 종이에 인쇄되어 엽서로 변화해 내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그간 배웠던 것들이 이런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구나, 목적 없는 활동이 아닌 결과물이 있는 행위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성이 사람의 감성에 이렇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정에 맞춰 예정대로 인쇄가 잘 되었기에, 내 나눔도 무사히 진행되었다. 오프라인 행사가 있을 때 '나눔 존'에 가서 냉큼 내가 가져온 엽서를 비치해 두었고,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것도 내 눈으로 확인했다. SNS 후기들도 열심히 찾아 읽으며 내가 나눔한 엽서를 인증한 사람들의 게시물에는 '좋아요'도 눌렀다. 비록 돈을 받고 판매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가 디자인한 엽서를 가져가고 소중히 여겨주는 것에서 엄청난 감동이 느껴졌다. 이래서 작가들이 작품활동을 하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사진: UnsplashBalázs Kétyi



  그 이후로 다시 내가 디자인한 것을 인쇄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디지털콜라주 작업을 할 때마다, 이게 인쇄되면 어떤 느낌이겠지?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작품(이라고 부르긴 여전히 부끄럽지만)이 여러 개 모이면 이번에는 팬아트가 아닌 디지털 콜라주 엽서 세트를 인쇄해 보고 싶다. 다음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어지간히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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