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면 안 되는 백만 가지 이유

나중에는 웃겨서 웃음도 안 나왔던


퇴사를 고민하던 어느 날, 회사에서 평소와 같이 뉴스레터들을 확인하던 중 엠브레인(조사회사)에서 온 메일이 눈에 띄었다. 직장생활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내용이었는데, 직장인들의 응답을 살펴보니 지금이 체감 IMF 때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며, 그러니 존버하겠다고 대답한 비율이 매우 높았다. 나는 사무실에서 소리 없는 절규를 터뜨렸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약 n년 전부터 퇴사를 생각하면서, 참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찾아가 나의 퇴사에 대해 상담했다. 첫 번째로 무속신앙에 의지해보려고 사주를 보러 갔다. 2025년 내 사주에 '퇴.사.' 이렇게 두 글자가 적혀있길 바랐던 것 같다. 이왕이면 너는 글 써서 먹고살, 아주 예술혼이 가득한 사주라는 말까지. 하지만 철학원 원장님은 내가 글을 쓸 사주가 맞다고는 하셨으나, 회사를 다니면서 취미로 글을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셨다. 한 타로카드집에 갔을 때 타로 봐주시는 분은 내 직장에 대해 듣더니 타로카드와 전혀 상관없이 본인의 의견을 설파하셨다. "아니, 그 좋은 직장 다니면서 왜 그만두려고 해? 계속 다녀~"


사주나 점성술(?)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다음으로 각종 워크숍과 강의를 전전하게 된다. 처음으로 참여했던 워크숍은 독립서점 창업을 도와주는 강의형 워크숍이었다. 한 시간이 넘게 열정적인 강의를 해주신 독립서점 사장님께 강의가 끝난 후 다가가 조심스럽게 몇 가지 질문을 드렸다. 답을 해주신 사장님이 물으셨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일 하세요?" 내가 대답했다. "지금은.. 공기업 다니긴 하는데요." 사장님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씀하셨다. "그럼 계속 다니세요." 포기하지 않고 N잡러로 사는 법을 알려주는 강의에도 참석해 보았다. N잡러로 살아가고 있는 분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부업에서 버는 수익이 본업의 수익을 넘어서기 전까지, 절대 본업을 그만두지 마세요." 당시 부업(글쓰기)에서 버는 수익이 본업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나는 조용히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각종 전문가들의 반대(?)는 어느 정도 예상하던 바였다. 나였어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잘 다니던 공기업을 그만둔다고 하면 일단 말리고 봤을 테니까. 다른 사람이 위험한 선택을 하겠다는데 말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만 내가 정말 신경 쓰였던 건, 다니고 있던 정신과 선생님의 강력한 반대였다. 당시 나는 여러 가지 사유로(정말 여러 가지 사유였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나의 퇴사를 꽤나 끈질기게 반대하셨다. 진단서를 써줄 테니 병가를 내고 좀 쉬는 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하실 정도였다. 퇴사의 이유 중 정신건강의 회복도 있었던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퇴사라는 게.. 그렇게 안 좋은가? 돈을 못 번다는 게 그렇게까지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걸까? 나의 내밀한 고민과 정신적 스트레스 상태까지 알고 있는 전문가가 퇴사를 반대하니, 머릿속 혼란이 가중되었다. 퇴사라는 큰 선택을 했다가 정신건강이 더 안 좋아지기만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래서 끝의 끝까지 선택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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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Brett Jordan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선생님의 말을 듣고 퇴사 안 한 채 회사를 계속 다녔다가 더 우울해지고 더 괴로워지고 삶이 더 싫어지면, 그러면 정신과 선생님이 책임져줄까? 당연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신과 선생님 입장에서는 환자가 퇴사했을 때 정신건강의 격렬한 변화가 가 오는 것보다, 퇴사하지 않았을 때 안정적으로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이라 판단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선택을 대신해 주거나 그 선택에 따른 내 정신건강을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은 나고,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도 나다. 이 쉬운 결론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쨌든 한 번 그런 결론을 내린 나는 더 이상 주변의 전문가에게 내 퇴사에 대해 묻지 않았고, 스스로 퇴사하겠다는 결심을 내릴 수 있었다.


퇴사를 감행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뭔가 대단한 전문가로부터 '너, 퇴사해라!'라는 통보를 받고 그 통보에 의지해 퇴사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각종 철학원부터 강의, 그리고 정신과에까지 물어보러 다녔던 게 아닐까. 이번에 내가 했던 선택이, 인생 처음으로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이었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모두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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