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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내기 권선생 Aug 27. 2024

마주한 세계, 그리고 나아갈 세계

「지켜야 할 세계」를 읽고

  윤옥을 중점으로 담긴 「지켜야 할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그녀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설 속 사건과 배경이 실제 한국과 상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의 시대적 상황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와 가족이 처해있는 상황과 마음이 고스란히 잘 묘사되었다. 그 속에서 외로이 홀로 버텨온 윤옥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려주었다.


  특히 교직 관련 이야기에 마음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내용처럼 아직 교직에는 ‘3월에 아이들을 잡아야 한다.’라는 말이 관념처럼 쓰이고 있다. 나 또한 이 말을 굳게 믿게 되어버렸는데, 때는 초임 교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없이 아이들에게 베풀었지만 결국 만만한 교사가 되어 면학 분위기 조성에 애를 먹고 말았다. 그 후‘퍼주는 교사가 좋은 교실을 만들 수 없다.’하는 닫힌 신념이 형성되었다. 이 책에서는 1980년대 당시, 학교에서 아이들을 잡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두발·복장 규정, 체벌을 나타내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교사들은 교육에 대한 일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학교에서의 그 어떤 폭력도 반대했을 테지만, 이제는 그들의 상황도 이해도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학교의 모든 산물에 대해 결코 옹호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생에게 지켜야 하는 상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학급 임원 학생들에게 회비를 걷는 것도 모자라 학급비, 후원금, 부교재비 등으로 갈취를 서슴지 않았다. 해당 장면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는 나의 학창 시절과 맞닿아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내 세계에서도 교육을 핑계로 한‘갈취’가 쉽게 일어났다. 아니, 사실은 그들이 강제로 빼앗지는 않았으니 ‘착취’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착취는 학급에서 알게 모르게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스승의 날은 물론, 사실 교육과는 꽤 동떨어져있다고 말할 수 있는 ‘밸런타인데이’,‘빼빼로 데이’에도 선생님 자리에는 과일 바구니와 꽃바구니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걸 들고 오지 말라고는 하셨지만, 그렇게 마다하지도 않았다. 어떤 선생님은 선물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누가 들고 온 것이냐며 이름을 수집하고는 했다. 전설처럼 들어왔던 ‘육성회비’,‘기성회비’가 우리 때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었다. 책의 시대적 배경에서 약 20년이나 더 흐른 다음이었지만, 나의 세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교사가 되고 얼마 후 ‘김영란법’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부패를 방지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은 금품이나 향응을 받는 게 제한된다고 했다. 원래도 받지 않았지만, 그 작은 사탕조차도 받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아이들을 향한 마음가짐과 태도가 전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을 나를 보며 그래도 교사는 촌지도 많이 받고 할 만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기분이 상할 때쯤, 그들의 자조 섞인 표정과 말투를 보니 다시금 부끄러워졌다. 그들의 표정에는 몇십 년 전 학교에서 받았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외에도 「지켜야 할 세계」는 우리에게 좋은 교사, 그리고 좋은 어른은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탐구케 한다. 다양한 사건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점입가경으로 만든다. 윤옥은 뇌병변장애가 있는 동생 지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 떠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시영을 위해 담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우리는 장애인을 보고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또한 수연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추구했던 자신의 세계, 자신의 보루가 무너지게 된다. 이때 선생이라는 적운이라는 작자가 수연을 돕는 척 자신의 사욕을 채운다. 만약 수연이 이때 제대로 된 어른을, 선생을 만났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무너진 세계의 폐허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수연을 잘 보살펴주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주인공 윤옥이라는 인물은 나와 크게 닮아있다. 무뚝뚝하고 소심한 편이지만. 사회 속 부도덕함에 예민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와 나를 가로 짓는 큰 차이점은 실천에 있는 거 같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빠르게 인식하지만, 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 반면, 윤옥은 그녀가 원하고 바랐던 교육을 실천하며 단체에 가입하고 변화를 위해 애쓴다. 또한 아주 작은 단서만 가지고도 동생을 찾으러 나선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녀가 부럽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 속 윤옥의 대사로 윤옥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세계란 말입니다.’ 윤옥이 교감에게 품었던 대사이다. 그녀는 이 신념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지키고 펼쳐나갔으리라. 


  선생님이 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다며 당당했던 지난날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돌아보자니 그때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악성 민원과 각종 업무, 주변의 눈치에 치여 나의 세계는 바래지고 있었다. 어느덧 튀지 않고 가장 보통의 교사가 되는 게 꿈이 되어 있었다. 교육에 대한 내 취향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고 나의 세계라고 할 게 존재하지 않았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윤옥의 용기를 본받고 싶다. 옅어지는 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외로운 순간이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난 성장하고 더불어 내 세계가 하나씩 쌓이리라 믿는다. 비로소 그 후에는 단단한 성벽을 지닌, 신념이 있는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당 글은 "2024. 창원의 책 독서공모전"에 응모할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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