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폭우 속에서의 아찔한 경험 : 시기리야

by 새내기권선생

스리랑카행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시기리야'의 강렬함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경을 간직한 고대 왕국. 정글 한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세워진 요새와 그를 둘러싼 왕궁이라니. 신비로움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은 우리를 홀렸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하기로 했다. 기대했던 장소를 눈앞에서 펼쳐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더욱 가슴이 벅차올랐다.

istockphoto-2134950757-612x612.jpg
istockphoto-175227357-612x612.jpg

1월부터 4월까지가 스리랑카 건기라는 정보를 철저히 확인하고 떠났기에, 시기리야를 더 뚜렷하게 잘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시기리야를 보러 가는 당일,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져 폭우로 변해버렸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현지 가이드님은 시기리야 바위산에 오르는 걸 말렸다. 우리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날짜 변경을 부탁드렸고, 가이드님은 마지못해 동선을 수정하여 하루 뒤로 시기리야 방문 일정을 미뤄주셨다.

드디어 시기리야를 마주할 날이 밝았다. 새벽녘, 다행히 빗줄기는 멎어 가고 있었다. 아직 하늘은 짙은 어둠에 잠겨있고 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지만, 우리는 그저 시기리야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감도 적지 않았다. 수많은 사진들을 통해 익숙해진 풍경이었기에, 정상에 오르면 희미하게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눈앞에는 짙은 안개만이 가득했고, 그 어떤 풍경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250115_062342.jpg

짙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하던 길, 시기리야의 역사를 듣게 되니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요약하자면, 시기리야 왕국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왕자였던 카샤파 1세가 왕위를 찬탈한 후,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건설한 도피성의 요새 도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20년 후 동생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시기리야는 역사 속으로 잊혀진 유적지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발견된 시기리야는 복원을 거쳐 지금처럼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매혹적인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동생에게서 도망치듯 세워진 왕국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스리랑카를 먹여 살리는 대표적인 관광지가 된 것이다.

BandPhoto_2025_01_17_00_31_49.jpg


시기리야 초입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사자 발 조각상은 당시 왕국이 얼마나 적군으로부터의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정말로 좁고 가팔랐기 때문에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추락하지 않을까 하며 연신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빗물에 흥건히 젖은 바닥은 발걸음마다 미끄러움을 더했고, 올라갈수록 짙어지는 안개는 앞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어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이 높은 시기리야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지 상상해 보았다. 바위에 겨우 움푹 파인 좁다란 계단은 당시 작업이 얼마나 위험천만했을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왕위를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던 카샤파 1세의 삶보다도, 이름 없이 스러져 갔을 하층민들의 고된 삶에 더 마음이 쓰였다. 물론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 역시도 바위 위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이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화려한 시기리야의 외관이 곧 내면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니.

그들의 넋은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왠지 모를 짠한 마음이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이름 없는 이들의 고된 노동과 스러져간 삶을 떠올리니 숙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를 통해 과거를 되짚어보고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역사의 중요성이란 이런 것일까. 흐릿한 안갯속 시기리야를 뒤로하며, 다음 여정에서는 부디 맑은 하늘의 스리랑카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keyword
이전 05화스리랑카 커리와 컵라면, 그리고 고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