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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착한 아이일 필요는 없어

by 새내기권선생

한 달의 끝자락,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단골로 한다.

"고마웠거나 칭찬하고 싶은 친구가 있나요?"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 공기는 OO이라는 이름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칭찬은 한결같았다. "OO이요. 부탁을 잘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OO이요.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기 때문입니다." OO 이는 고개를 숙인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심 기분은 좋아 보인다. 아이들의 폭풍 칭찬이 이어지고, 나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나를 흠칫하게 만든 답변이 나왔다. "OO이요. 그냥 착해요. 바보같이." 순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마치 칭찬이 아닌 경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어릴 적의 나는 '착함'이라는 갑갑한 갑옷 속에 살았다. 누구도 나에게 착해야 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다. 다만 타인의 기대가 내 몸속에서 자꾸만 쌓여만 갔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누구에게나 착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있었다. 나 스스로가 만든 투명한 틀 안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이는 나를 병들게 하고 있었다. 그 단단한 벽을 깨고 '착하지 않은 나'를 마주하는 과정은 꽤 고통스러웠다. 내가 만든 벽은 아주 단단했기에 깨는 과정이 매우 아팠기 때문이다.

그래서 OO이가 더욱 걱정되었다. '아이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건 아닐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싫은 내색조차 하지 못하며 살게 되는 건 아닐까?'. '바보같이 착하다'는 말이 칭찬이 아니라 위험 신호처럼 들린 게 아마 그런 이유였겠지.

요즘 세상은 '착하다'는 말을 모순적으로 사용한다. '너무 착해서 손해 본다', '착한 사람이 호구된다', '착하게만 살면 이용당한다'. 세상은 착함을 강요하면서도, 동시에 착한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본다. 그 모순 속에서 어른들도 헤매는데, 아이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혼란스러울까.


갑옷을 벗어던지는 게 얼마나 무섭고 죄책감이 드는 일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신경 써 봤으면 좋겠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감정이 우선시 되었으면 좋겠다. 꼭 착한 아이일 필요는 없다. 착하지 않아도, 거절해도, 화를 내도, 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도 괜찮다. 그건 솔직한 거지, 무례한 게 아니다. 스스로의 행복이 타인의 칭찬보다 중요하다는 걸 꼭 잊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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