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작은 지구였다. 앞에 나가 춤추고 노래하며 나서길 좋아하는 아이가 있나 하면,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아이도 존재했다.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지만, 상대방의 마음이 다칠까 노심초사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 나이 때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하고.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난 평범한 아이였던 거 같다. 아니지, 좋게 말하면 평범이지만 냉철하게 말한다면 '존재감 없는 아이'에 가까웠던 거 같다. 새 학기가 되어도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 다만 글씨를 예쁘게 썼던 거 같다(글을 잘 썼던 건 아니다). 그 이유였을까 담임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내 일기장을 칭찬하셨고, 아이들 앞에서 읽어보라고 시키곤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 나타났다. 디크레센도로 작아지는 목소리로 글을 읽는 걸 보며, 담임 선생님들은 대부분 마지못해 글을 대신 읽어주시곤 했다. 나는 그때는 그저 부끄러움이 많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진작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범석이는 참 괜찮은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자신감 좀 가져봐."
방학마다 받는 통지표에 쓰여 있는 문구였다. 앞 문장에는 칭찬이 있었지만 뒷 문장에는 한결같이 '내향적인 성격이 달라진다면~'이라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나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학기 초마다 적어 내는 설문지가 부담스러웠다. '가장 친한 친구는?' 이 질문이 특히나 그랬다. 두루두루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꼭 한 명을 골라야 한다고 했다. 공백으로 제출했더니 담임 선생님이 조용히 부르셨다.
"친한 친구가 왜 없어?"
그의 말투와 말투와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어른들에게 친한 친구가 없다는 건 곧 무언가 문제 있는 학생이라는 뜻이었다. 내향적인 성격은 곧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것이었고, 고쳐야 할 성격처럼 여겨졌다.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내가 소심하다는 걸 직시한 후부터는 더욱이 소심해졌다. '난 대체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을까.' 의욕 넘치고 할 말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여튼 나는 어른들의 사랑을 고팠다. 일부러 앞장서서 의견을 말했고, 발표하기 위해 나서기도 했다. 친한 친구 하나를 만들려고 애썼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아이는 성인이 되어갔다.
대학생 때 처음 MBTI 검사를 해봤다. 결과는 INFJ.
'내가 내향적이라고?'
외향인이라고 확실히 했던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몇 번이고 다시 검사를 해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본성이라는 건 타고나는 걸까. 바꿀 수 없는 걸까. 사실 스스로를 괴롭히는 과정 속에서도 언제부턴가 지친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에게 맞춰 사는 이 사람이 진짜 너일까 하고. 문득 내게 연민이 생겼다. 이 짧은 인생 속 왜 이렇게 나는 남 눈치 보며 살고 있을까 하고. 그러다 내가 언제 가장 행복할까 하고 생각해 봤다. 친구들과 포차에서 술 마시는 시간보다 혼자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시간이었다. 타인과 밥 먹는 자리보다 집에서 혼자 반찬 꺼내 먹는 시간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새로운 선생님들과 있다 보니, 조금 부담되기도 했다. 그들의 말씀을 들을 때였다. 한 선생님께서 툭하고 말을 뱉었다.
"선생님은 원래 말이 없는 편이야?"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낯을 많이 가려서요.' '오늘 좀 피곤해서요.' 그렇게 생각하다 멋쩍은 웃음과 툭 하고 대답해 버렸다.
"저는 I라서요."
"아 그래?" "그럴 수 있지!"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대화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특별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 이 날 이후, 내게 'MBTI'라는 게 정말 특별한 의미가 되고 말았다. 뒤풀이 모임에 나가기 싫을 때,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할 때. "I라서요"라는 한마디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많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은 내게 '고쳐야 할 성격'이라는 꼬리표를 주었다. 소심하다는 말 뒤엔 언제나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를 뒤따랐다. 오랫동안 이를 문제라고 여겼다. 고장 난 기계를 고치듯, 나를 바꾸려 애썼다. 하지만 MBTI는 달랐다. "당신은 I입니다"라는 문장은 사람의 성격을 평가하는 게 아닌 설명을 덧붙이고 있었다. 결함이 아니라, 그저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가 있다고. 내게 용기를 심어줬다.
사람들은 MBTI를 지루하고 뻔한 이야기라고 한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물론 MBTI가 모든 걸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 네 글자가 한 사람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사람됨을 설명해 주는 수단임은 분명하다. 오랫동안 이상한 사람이었던 내가 그저 다른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은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충분하다. 덕분에 나는 변명대신,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MBTI가 있어 참 든든하다.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 주어 참 고맙다.